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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호(權元浩)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한 전도사

Joyfule 2018. 9. 17. 09:17


 

 

 

권원호(權元浩)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한 전도사

1. 출생과 성장

권원호 권원호 전도사는 1904년 8월 5일(음)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신우리 평화스러운 농촌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권오방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04년 이라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물리친 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던 시기여서 권원호 어린이는 일찌기 기독교계에 들어와 중화읍교회 장로로서 봉사하며 나라를 걱정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신앙과 애국심으로 성장했다. 아침마다 드리는 가족 기도회에서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 주시고 이 민족을 왜인의 손길에서 구해 주소서...]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원호의 어린 가슴에는 애국심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더욱 주일학교와 밋숀 스쿨(당시 중화읍 교회에는 6년제로 경영하는 사립경의학교가 있었음)에서 받은 민족 교육은 장차 이 민족의 살길은 신앙 밖에 없다는 확고한 사상을 가슴깊이 배울 수 있었다.

1923년 (음력) 2월 7일 20세의 젊은 이로 성장한 원호는 부모의 주선을 따라 윤치호의 장녀 순덕양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교회 일에도 충실하며 평화스럽게 살아갔다.

2. 농민운동을 폈던 시절

그러나 당시 왜정의 토지수탈은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농토에서 평안히 농사의 종사하며 살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왜인들은 이런 구실 저런 구실로 한국인의 비옥한 농토를 수탈하는 바람에 한국인들은 보따리 걸머지고 만주로 가야 하였고 만주로 가지 아니하려면 산골로 들어가 석전(石田)을 개간하여 초식을 먹고 사는 화전민이 되어야 했다.

권원호도 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였다. 돌밭을 갈아 감자를 먹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도 조국땅에서 이 백성을 깨우치며 왜인과 싸워야 한다는 애국 일념에서 황해도 신계군 사지면 막대리로 이주해 갔다.

막대리 견돌에는 주은동교회가 있어서 권원호는 교회 집사로 열심히 봉사하는 한편 밤이면 야학을 설립하여 남녀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는 일에 힘을 썼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왜경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여 다시 주거지를 옮겨야 하였다. 1931년 황해도 신계로 온지 2년만에 이번에는 강원도 고성으로 갔다. 그는 고성감리교회(당시 담임자 이진구 목사)주일학교 교사 또는 청년회 회원으로서 청소년들에게 배일사상과 애국정신을 길러주기에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담임 목사가 출타할 때에는 대신 설교를 맡아 했다. 병자나 낙심자 가정에 심방도 다녔다. 그의 뜨거운 기도와 열정어린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었다. 당시 고성구역은 고성읍 교회를 위시하여 장전교회,온정리교회,추동교회 등 4교회로 조직이 되여서 담임 이목사는 4교회를 돌보기 위해 늘 출타가 잦았다. 목사가 출타한 동안에는 권원호가 전도사 자격으로 일을 했다. 그는 그처럼 6년간의 교회 봉사를 통해 교역자로서의 자질을 착실히 쌓았다. 이제는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간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할 수 있게 되었다.

3. 교역의 길로 나서는 권원호 전도사

권원호는 1936년 4월에 모인 연회에서 원산지방 * 통천교회로 파송을 받아 목회를 시작했다. 권원호는 자신으로서도 각오한 바 있어 목회의 길로 나섰지만 담임 이진구 목사의 권고도 있어서 힘있게 나섰던 것이다. 그의 설교는 복음적이었고 애국적이었으며 그리고 부흥적이어서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아니해서부터 일약 부흥 설교가로 각광을 받았다.

한편 생각해 보면 권전도사는 목회하다가 그만 쉬어야 할 가장 어려운 시절에 오히려 교회를 담임해 갔다는데에 우리는 그의 신앙을 가이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하여간 권전도사는 6년을 하루같이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설교하고 심방하며 열심히 목회를 하였거니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면서 겨레에게 민족혼을 깨우치기에도 온갖 힘을 다했다.

1939년 5월 경성 정동제일교회에서 제7회 3부합동 연회가 모였다. 연회에 참석한 권전도사는 가장 왜경의 박해가 심한 회양읍교회로 자원해 파송을 받아 부임했다. 회양교회는 이봉운 전도사가 시무하다 왜경의 박해로 떠나 간 교회였다. 권전도사는 왜경의 감시나 박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힘을 내어 교인 가정을 심방했다. 왜경의 박해가 심하다는 것은 일본의 멸망이 가까왔다는 증거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민족을 깨우고 정신을 가다듭게 해야 한다는 것이 권전도사의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루도 쉴사이 없이 전도와 심방에 힘쓰며 배일 사상 고취에 있는 힘을 다했고 교회 봉사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1940년 8월 초에는 금강산 온정리 수양관에서 모인 원산지방 교역자 수양회에도 다녀왔다. 그는 동역자들에게도 하나님은 결코 이 나라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조국의 해방을 암시해 주기도 했다.

그의 그런 은밀한 민족운동을 왜경이 모를리 없었다. 드디어 왜경은 권전도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권전도사가 그런 강요에 응할리 없었다. 1940년 10월 초에 그를 구속하려고 가택수색을 하는 도중 그의 가정에서 태극기가 나왔다.

왜경은 권전도사를 구속하는 한편 교회중요 임원들의 가정도 수색하는 중에 역시 태극기가 발견되자 태극기 사건의 배후를 캐고자 하여 애를 썼으나 배후에 아무런 단서도나오지 아니함으로 권전도사만 구소하고 2년 가까이 조사했다. 그러나 권전도사의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4. 순교자의 반렬에 오른 권전도사

권전도사에게 가하는 왜경의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물먹이기]등 가장 고약한 고문이었다. 그러나 "태극기는 조국의 국기이므로 보관한 것이었고 신사는 우상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참배할 수 없다"는 것이 권전도사의 답변이었다. 백번은 심문해도 대답은 그 한가지 뿐이었다. 그 때마다 심한 고문이 가해졌다.

권전도사가 심한 고문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신도들은 경찰서를 방문하여 이제라도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승낙하고 어서 나오도록 하라고 종용하였다.그러나 권전도사는 오히려 신도들을 책망도 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라"고 권고도 하여 신자들은 두번 다시 그런 말은 입밖에 내지 못했다.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왜경도 권전도사의 신앙을 꺾지 못하고 서울로 이송하여 재판을 받게 됐다. 드디어 권전도사는 1942년 1월 2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뤘다. 옥중에서도 그는 계속 같은 죄수들에게 전도하며 민족 사상을 고취하자 1943년 11월 10일에는 불경죄까지 가산시켜 징역을 1년 더 추가 선고했다. 그리고는 그를 독방으로 이감시켜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못하게 하는 한편 음식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오랜 고문과 영양부족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권전도사는 마침내 1944년 4월 13일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안으로 올라가 안가웠다. 그는 이 땅에서 영원히 떠나 갔다. 그러나 그의 굽힐 줄 모르는 굳센 신앙과 나라와 겨례를 뜨겁게 사랑하던 정신은 이 민족의 가슴 속에 도도히 그리고 영원히 흐를 것이다.

* 권원호 전도사의 첫 파송된 통천교회에 관하여 :권원호 전도사의 사위되는 임청산교수의 기록에 의하면 권전도사의 첫번 파송받은 교회가 통천군 흡곡면 명고리 통천교회라고 했고 크리스챤신문에 소개된 권원호 전도사 순교 사화에도 통천교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통천교히는 통천군 통천면 서리 195-2에 있고 통천군 흡곡면 명고리에 있는 교회는 흡곡교회다. 한데 1937년도 연회록에 게재된 파송기에 의하면 통천교회와 흡곡교회는 모두 미파로 되어 있고 담임자가 파송되어 있지 않다. 당시 통천교회에는 지교회가 6개처가 있었고 흡곡교회에는 지교회가 7개처가 있었다. 그러니까 권전도사가 파송받아 간 교회는 통천교회의 어느 지교회든가 아니면 흡곡교회의 어느 지교회였을 것이다. (윤춘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