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김용기 장로

Joyfule 2018. 9. 8. 07:44

  

김용기 장로


● 영웅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삶

 

아버지 김용기 장로는 하나님과 흙과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의 연관성을 인생관으로 삼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첫째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고, 둘째 흙에 의존하여 흙과 깊이 연관된 사업을 해야 하며, 셋째 서로 믿고 사랑하며 협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아름답고 존귀한 인간 생활이라고 믿었다. 사람은 자기의 살 길을 스스로 안다. 어둠보다는 밝은 빛이 생명의 길이며, 순간보다는 영원한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내일 죽는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고, 순간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남겨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마니산을 흔들리게 하려고 아버지는 나이 열일곱에 난데없는 영웅심이 번뜩여서 강화도 마니산으로 향했다. 왜 마니산인고 하니, 일찍이 세종대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이 마니산에서 사흘 동안 기도를 하여 산을 세 번 흔들리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도 아버지처럼 서서 다니는 사람일진대 나라고 산을 흔들 기백이 없을 것이며, 나라고 해서 이 땅의 지배자가 못되랴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같은 생각을 소상히 글로 적어 부모님이 잠든 머리맡에 놓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강화도에 갔다. 그리고 마니산 중턱에 여승들만 기거하는 정수사라는 절이 있어서 아버지는 그곳에 방을 한 칸 빌어 짐을 풀었다. 새벽이면 마니산 꼭대기를 향해 뛰듯이 산길을 접어 들었고, 산 아래에 엎드린 마을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오를 때라야 허기가 져서 터벅터벅 절로 다시 내려왔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때때로 실의에 빠져 머나먼 서해의 누르무레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산아! 제발 흔들려 다오’라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정수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 스님이 이따금 내 방으로 갓 찐 시루떡을 디밀곤 했는데, 어느 날은 방으로 들어와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다. 아버지는 반갑고 고마워서 “네, 이 산이 흔들리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할머니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호물호물 입매를 흐트리며 웃더니 “엇다 그래, 네 녀석이 산을 흔드는 것 좀 보자” 이러시며 밖으로 나갔다. 기도를 시작한 지 꼭 마흔이레가 되던 날, 아버지는 그날도 마니산 꼭두머리에 앉아 이제 내가 이 나라의 임금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여태까지 기도한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흔들리는 시늉을 해줘서 열일곱 먹은 이 사내의 체모를 살려 달라고 빌었다.

날씨는 여러 날에 걸쳐 맑았다. 썰물 때가 되어 바닷물은 십리만큼이나 빠져 나가고, 꺼멓게 드러난 갯벌 위에는 조개줍이들이 고물거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으며 숲은 죽은 듯이 잠잠했다. ‘움직인다.’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산이 흔들려서 어쩌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소망는 무모하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여기서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돌아가서 일을 하자.’ 그 길로 다시 봇짐을 싸들고 경기도 양주에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 복판에서부터 먹어보게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니, 우리나라 땅은 너무나 좁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인물에 비겨서 내가 일할 땅이 너무도 좁았다. 아버지는 마니산에서 내려온 지 일주일 만에 중국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닭을 수백 마리나 기르고 있었다. 때마침 어느날 아버지가 달걀 판 돈을 장롱 속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 금액을 확실히 기억해낼 수 없지만 제법 큰 돈이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훔쳐서 서울로 갔다. 그리고는 국경이 가까운 의주로 가는 열차를 탔다. 그때도 아버지는 부모님 머리맡에 긴 편지를 써 두었다.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요동 칠백 리를 질러서 심양으로 가기에 앞서, 아버지는 천진에서 얼마간 머물렀다. 천진은 영국, 프랑스, 일본의 조계지역이므로 외국의 문물을 마음껏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물이 채 안 된 어린 아버지의 눈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신기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계를 내 손에 넣어야겠구나!’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


심양 땅에 발이 닿자, 아버지는 마적단이 있는 데를 찾아 나섰다. 사실 내가 천진에서 심양으로 온 것은 이 마적단에 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심양은 마적의 집결지였다.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려면 힘이 필요한데 아버지 혼자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마적단에 들어가서 그들의 두목이 된다면 세계를 지배하는 데 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심양의 서탑이라는 동네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아버지는 낯선 땅에서 마적을 만나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마침내는 이 서탑에서 묵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사람들 가운데 마적단과 내통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건 교회가 있는 곳에서 묵었으며 주일 예배에는 꼭 참석했다. 그런데 서탑에는 조선인 목사가 예배를 보는 교회가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 되어 교회에 나갔더니 이성락 목사라는 분이 설교를 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가려는데, 그 목사가 쫓아 나와 “자넨 여길 어떻게 왔나?”하고 물었다. 후줄근한 두루마기를 입고 객지 살림살이가 든 노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으므로 한눈에 떠돌이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목사에게 이러이러해서 마적단에 들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했다. 목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아, 그래, 잘 왔네. 자네가 예까지 왔으니 내 점심이나 삼세”하고는 내 등을 툭툭치며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는 자못 용기가 생겼다.


목사가 아버지를 데리고 기름내와 짠내가 진동하는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적이 실말했다. 오랜만에 청요리를 먹게 되었다고 잔뜩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부침개집 주인더러 “그 징빙 하나를 통째로 주시오”라고 했다. 한 개로 두 사람이 먹어도 남을텐데 저걸 통째로 달라니 웬일인가 했다. 목사는 그 뜨끈뜨끈한 징빙을 두 손바닥에 종이를 깔고 받더니 대뜸 내게 넘겨 주었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고 얼떨결에 두 손바닥을 펴서 받았다. “자네, 이걸 복판에서부터 먹어 보게.” 목사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단박에 마음이 상해서 “어떻게 그렇게 먹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이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라고 따지듯이 말했다. “이놈! 떡 하나도 복판에서부터 못 먹는 놈이 세계를 복판에서부터 먹으려고 들어? 지금 당장 조선으로 돌아가서 네 힘으로 주국부터 지도해. 썩 돌아가!” 아버지는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돌아왔다. 모란봉의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니 강은 푸르게 넘실거리며 어디론지 흘러가고 있었다. 욕망은 끝이 없고, 이루어지지는 않고.

부벽루 난간에 걸터앉아 긴 시간을 생각에 잠겼다. 평양시청 문 앞에는 칼 찬 일본인 순사가 왔다갔다 했다. 시장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시청 앞을 얼씬대다가 그 순사에게 “너 무슨 볼 일이 있느냐?”라는 매서운 핀잔을 듣고는 을밀대로 갔다. 을밀대에서 하늘을 보고 누웠는데 갑자기 배가 뒤틀리듯 아파왔다. 급히 먹은 냉면이 체한 것이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고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다. 내 교만한 야망에 눈이 어두워 그동안 기도를 잊고 있었던 아버지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가까스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여! 당신의 종이 오늘에야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교만한 종을 마음껏 벌하시옵고, 당신 안에서 진실로 이 땅을 위해 순명할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냉면 한 그릇에 깨우친 아버지는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 ‘대동아’와 농사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의 당시 집 뒤로는 예봉산이 솟아 있다. 3년의 무모한 방랑 끝에 아버님은 부모님 모시기에 전력했다. 동네 사람들은 예봉산 정기를 타고 나서 빼어난 효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버님의 꿈은 단순한 ‘효’에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 우리나라 인구인 2천만, 2천만 분의 일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웃한 열 집의 사람들을 설득해서 울타리를 헐고 조그마한 집단촌을 만들었다.

광동전문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농사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 집은 닭을 기르고 벌을 모아 길렀다. 길도 넓히고, 가로수를 심고, 집과 집 사이에는 무궁화를 심었다. 마을이 윤택해지자 일본 사람들은 공출을 심하게 해갔다. 그래서 아버님은 공출을 막기 위해 논을 없애고 벼를 심었던 땅에 고구마를 심었다. 쌀만 공출해가고 고구마는 공출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마을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공출로 쌀을 빼앗겨 돈을 만들 수 없게 되자 아이들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님 마을의 아이들은 고구마를 팔아 모두 서울로 유학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아버님께서 꿈꾸시던 이상촌은 어김없이 진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일본인 순사들은 우리 촌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않는다며 들볶았다. 한번은 경기도 경찰국의 고등계 주임인 다니치가 아버지를 불렀다. 그는 아버지를 취조실로 끌고 가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것은 ‘천황 폐하’에게 불경한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꾸했다.

“사람들이 당신 아버지에게는 절을 하지만, 그 문패에 절을 하지는 않소. 나도 마찬가지요. 천왕 폐하가 내 앞에 있다면야 수십 번인들 절을 못하겠소? 그러나 그 문패에는 못하겠단 말이오.”


이 일이 있고 나서 우리촌에는 묘한 손님이 찾아왔다. 조선총독부의 옌도 정무총감이었다. 그는 수행원 40명을 이끌고 우리집을 찾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기도 경찰국에서 총독부에 우리 이상촌의 현황을 알리고, 아버지를 이용하면 전시의 식량난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는 앞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 신사였다. 식민지주의자들의 능란한 앞잡이로서는 손색이 없어보였다. 막내 아들벌이나 되는 아버지에게 깍듯이 “하이, 하이”라고 했고 위협하는 말투는 조금도 쓰지 않았다. 

 

“당신이 하는 일은 정말로 훌륭하오. 다 같은 황국 신민으로서 당신을 치하하는 바이오. 이제 이 일은 이 마을의 일일 수만은 없소. 당신은 이 좁은 땅에서만 뜻을 펼 것이 아니라 총독부로 들어와 ‘대동아’를 만드는 데 동참하기 바라오. 내가 총독부 전시생활과에 당신 자리를 마련하겠소.”


그의 말 솜씨는 어디까지나 정중했고 품위가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저는 한낱 농사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농사꾼은 자유를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 밑에 들어가면 숨이 막혀 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대동아’는 저 같은 농사꾼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저는 이 나라와 이 땅의 이름없는 농사꾼인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옌도 정무총독은 별다른 까탈을 부리지 않고 돌아갔다. 40명의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촌길을 걸어나가는 노회한 정객의 뒷모습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가 다녀간 뒤로는 우리촌에 주재소 순사들이 얼씬도 안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농사꾼으로 일했으며, 고향이 어느 정도 살 만한 촌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곳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구기리)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경기도 용인군 원삼으로 옮겨 지금의 가나안 농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광복도 맞았다. 6·25도 겪었다. 그러나 언제나 아버지는 땅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일했다. 땅이 아버지의 미쁜 반려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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