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김용기 장로

Joyfule 2018. 9. 11. 09:36

  

김용기 장로


●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우리 민족의 의뢰심은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들 하지만, 그 중에서 완전한 주권국가로 행세한 때는 상고시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 밖의 세월은 강대국의 침략으로 그들의 지배를 받고 살거나 그 그늘 밑에서 살아왔었다.

그 족적을 살펴보자면, 삼국시대는 중국 당나라의 그늘 밑에 살았고, 고려 4백여 년은 원나라의 침략사이다. 그리고 조선 5백여 년은 명나라와 청나라를 상전국으로 섬겼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사이며,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미국의 원조를 받으면서 그 그늘 밑에 살고 있다. 이 나라들은 우리나라보다 큰 나라들이고 힘이 세며, 돈이 많고 문화가 발달된 나라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그들의 지배를 받거나, 살아남기 위해선 그들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온 글들도 그 의뢰심을 배양하기에 알맞은 글들이었다. 중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는 한문을 배웠고, 일본에게 병탄을 당했을 때에는 강제로 일본글을 배웠고, 그 일본글을 잘해야만 먹고 살기에 편하도록 교묘하게 조종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학생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도 영어를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자.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당나라를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조는 혁명으로 건국되었지만, 우리 왕이 중국의 왕을 천자로 섬긴다는 조건하에 그들의 승인을 받았고, 비로소 나라 행세를 했다.

이조 말엽에는 정치인들이 세 파로 갈라져 러시아를 받는 측과 일본을 받드는 측, 그리고 중국을 받드는 측으로 나뉘어 서로 큰 나라들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사대 사상은 하루 이틀에 젖어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서 이 사대 사상을 뿌리뽑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주체성과 진정한 독립성을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이 사대 사상, 즉 의뢰심을 없애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한다.


의뢰심을 없애고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길러져야 하므로 어린 아이들에게도 각기 일감을 맡기고 제 할 일은 어른이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다. 가령 어린아이가 넘어져도 절대로 일으켜 주지 않으며, 제 스스로 일어나게 만든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이 병폐는 극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파싸움이나 감투싸움 등도 바로 단결력이 없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백성들인데 협력하지 않고 협동하지 않으며 분열만 일삼고 있으니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단합하지 않고, 부자간과 부부간 모두가 제각각으로 행동할 때 그 가정은 파괴된다. 그래서 우리집은 가족들이 사랑으로 단단히 뭉쳐지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가장 첫 번째 사업이므로 나는 그 사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한 급선무는 없다고 하셨다. 

 

가정에 대한 의무를 등한시 하는 자들은 다른 영혼들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을 먼저 분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우선한다. 우리집은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가정에 기쁜 일이 있으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합창으로 즐긴다. 그리고 지금 집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군학교도 온 가족이 단결하여 함께 해 나가고 있다.


남을 위해 봉사할 줄 모르는 자세 또한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이것도 단결력이 부족한 병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봉사 정신으로써 농군학교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 교육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족들이 모두 도와주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를테면 전 가족 모두가 교직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며느리와 딸들은 그 학생들의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해야 하며, 아내는 어린 손자들을 돌봐야 한다. 

 

그리고 교육기간에는 아이들까지도 제 마음대로 놀지 못한다. 우리 가정의 생활 그 자체가 학생들이 보고 배우는 교재이기 때문에 세 살짜리 손자 놈의 행동도 교육적이어야 하므로 평시에도 철저히 훈련을 시킨다. 그래서 우리집 어린 손자와 손녀들은 절대로 일하는 어른들에게 매달려 칭얼대거나, 군것질을 하거나, 놀다가 넘어져도 누가 일으켜 세울 때까지 울고 있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힘으로 해나가도록 교육시킨다.

또한 학생수가 많을 때에는 갓 시집온 며느리 방이 학생들의 침실로 제공되지만, 며느리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 그만큼 전 가족이 무언가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총력을 기울여 봉사한다. 이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김용기 장로 : 부국의 꿈 이룰 農軍지도자 양성

 

“한 손에는 성서를 쥐고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머리에는 애국의 면류관을 쓰고, 허리에는 겸손의 띠를 두르고,발에는 개척의 신을 신고…” 안병욱 교수가 20세기 한반도의 예언자로 묘사한 이 인물은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다.

‘노동의 종말’을 얘기하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는 김용기 장로의 주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도 많은 청년들과 기업인,공무원,심지어 수녀와 승려들도 그의 노동철학을 배우기 위해 가나안 농군학교를 찾고 있다.

그는 1912년 경기도 양주 봉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춘교는 농부이며 한학자였지만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김용기는 한때 ‘만적이 돼 조선독립의 선봉장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만주에 가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오히려 신앙을 되찾고 강화도 마니산에서 40일간 기도를 한다.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농사야말로 산업의 원동력이다. 주권을 회복하려면 경제 자립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식인일수록 농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농민운동에 투신한 김용기는 농업기술의 개발과 신앙으로 모두 일하고 모두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이상촌(理想村) 건설을 꿈꾸기 시작한다. 33년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봉안이상촌은 그 꿈의 첫 실현이었다. 그는 40명의 마을사람에게 영농기술과 함께 신앙을 전했다. 모두 하나님 앞에 평등한 자녀이며 근로와 봉사, 희생이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봉안이상촌은 설립 5년만에 6500평의 밭이 1만3700평으로,9000평의 논이 1만3900평으로,4000평의 과수원이 1만2000평으로 늘어나는 대성공을 거뒀다.


봉안이상촌은 독립운동 기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몽양 여운형이 이곳에 몸을 숨기기도 했고 일제의 쌀 수탈에 반대해 논농사를 줄이고 밭농사를 짓는가 하면 강제 징용에 끌려갈 처지의 젊은이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도,소련군도 물러가고 농민들이 뭉쳐 이상촌을 만들 것을 주장하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황무지로 변한 해방된 조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개간해 이상촌을 건설했다. “우리에겐 자본도 기술도 없다. 그러나 땅이 있다. 땅을 일구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그는 이런 주장을 온몸으로 실천해 입증했다. 삼각산 농원과 에덴향을 세웠고 농민들의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 복음농도원을 설립한데 이어 54년 경기도 광주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했으며 62년 흙의 철학을 전파하는 가나안농군학교의 문을 열었다. 농군학교라는 이름에는 외적의 침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난과 부패로 이것을 물리치기 위해선 농군(農軍)이 필요하다는 정신이 담겨 있었다.

1973년 원주에 제2가나안 농군학교, 1982년에는 가나안농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정신의 용광로다.

그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이를 몸소 실천, 농민운동을 정신운동으로 승화시켰다.

1966년 필리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김용기 장로는 수상 연설에서 당시 세계로 확산되던 핵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길을 역설했다.

“이 지구상에 핵폭탄이 있는 한 인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지혜와 총명, 사랑만으로 인류의 평화가 가능합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인류에게 빈곤을 몰아내자, 평화를 수립하자, 영생을 얻자는 세가지 구호를 높이 외치고 싶습니다”

김용기 장로는 1988년 8월1일 영원한 동산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장’으로 치러졌다.

 

■ 농민운동가 김용기 장로 /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김용기 장로는 1909년 9월 5일 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김춘교와 어머니 김공윤 사이에서 다섯 형제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런데 김용기가 세 살 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그의 어머니는 크게 근심했다. 아무리 용한 무당을 데려다가 밤을 새면서 굿을 하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또 점쟁이에게 물어보면 좋은 약 처방을 받을까 하여 그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점쟁이 앞에 정성을 다해 아이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 점쟁이의 말이 걸작이었다.

“이 아이는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습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린 용기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용기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려고 하는 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머니는 전도지를 주면서 이 길로 10리 정도 나가면 용진교회가 있으니 계속 걸어가라고 했다. 그 말만 믿고 어머니는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아이가 크게 숨을 쉬더니 엄마를 부르면서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기에 가까운 주막집에서 잠깐 쉬면서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을 얻어 주고 그 아주머니가 준 전도쪽지를 읽어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용기 엄마는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해’라며, 그 발걸음을 재촉하여 용진교회를 찾았고 이후 계속 출석하게 됐다. 그렇게 용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동중학교에 진학하여 졸업을 앞두고 중국 심양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국의 넓은 대륙을 보고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농사 짖는 법을 배워야겠다 결심하고 곧 귀국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농사짓는 동안 성년이 되었고 이웃 마을에 사는 김봉화 양과 결혼도 하였다. 농군의 아들, 딸이었던 이들 부부는 흙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복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농토를 일구어 농사를 짓던 김용기는 버려진 땅을 찾던 중 4000여평의 땅을 싼 값에 구입을 하여 ‘봉안 이상촌’을 계획하고 기도하던 중 좋은 동지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평에서 여운형, 홍천에서 이인준, 광릉에서 최광렬 등이 ‘봉안 이상촌’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이 모두 봉안 마을로 이사를 오자 농촌이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김용기를 중심으로 해서 마을 한복판에 봉안교회를 설립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만 조선 농촌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교회를 중심으로 금주 금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봉안 마을은 겨울이 되어도 투정꾼들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 남자들은 겨우내 가마니를 짜서 시골 장터에서 팔아 가정생활에 보탬을 주었다.


김용기는 해방이 되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복민사상운동(福民思想運動)을 전개하면서 1946년 10월 일본인이 운영하던 삼각산 아래에 있는 과수원을 인수하여 온 가족이 개간하여 많은 수확을 올렸다. 김용기 가족이 황무지 땅 1만평을 개간하여 만든 과수원은 당시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재, 서울 은평구 구기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이곳에 교회를 신설하고 활발하게 ‘농촌 이상 운동’을 전개하다가 과수원과 교회를 유재현 목사에게 인계하였다. 현재 이 자리가 임마누엘 수도원이 되었다.


김용기는 1950년 6·25전쟁으로 황폐화 되었던 용인군 원삼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건설하고 복음 농도원과 복음농민고등학원을 창설하였다. 김용기 장로는 이곳에도 역시 교회를 신설하고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이 학원이 근간이 되어 그가 평생을 바랐던 이상촌 건설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광주군 황산 그 넓은 황토밭을 개간하여 1955년 가나안농장이라 이름 짓고 드디어 1962년, 평생 원하는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고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는 평생 농촌에 살면서 농촌지도자가 되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학교만 설립한 것이 아니라 농촌운동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가난안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비로소 가나안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고 믿음의 반석 위에서 훈련생과 함께 교회를 통하여 영성훈련을 함께 시키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이때 가나안교회는 영성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광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가 서울시로 확대되자 가나안농군학교 제2캠퍼스를 마련하게 되었다. 공기 좋고 자연환경이 좋은 강원도 원성군 신림에 제2가나안농군학교 설립하였다. 역시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거기에서 근무하는 김용기 장로의 자녀들은 학감, 교무과장 여기에 교관까지 모두 맡아 수고를 하였다. 

 

일생을 오직 이상촌 농촌을 만들겠다는 그의 위대한 정신이 1966년 필리핀에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해서 상을 주는 막사이상을 한국의 농촌운동가 김용기 장로가 사회공익상으로 수상을 하였다. 그 이후 농림부 장관상, 향토문화공로상, 고려대 창설자인 인촌 문화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을 하였다. 1978년에는 필리핀 세이버대학교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김용기 장로는 평생을 양복, 구두를 신어 본 일이 없으며, 평생을 자신이 재단한 간단한 국민복, 고무신을 신고 1988년 8월 1일 농사꾼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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