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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곱게 늙어간다는 것

Joyfule 2025. 2. 24. 10:4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곱게 늙어간다는 것   

 

실버타운에서 이년이 넘게 생활을 했다. 실버타운은 어떻게 늙어갈지를 배운 좋은 교육장이었다고 할까.

노인들의 성품도 여러 종류였다. 잘 익은 과일같이 단물이 흐르는 곱게 늙은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말이 없이 조용했다. 온화한 얼굴에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생일 같은 날이 오면 이웃 노인들에게 떡이나 과일을 돌려 함께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과거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학벌이나 재산이나 지위에 관해서 철저히 침묵했다. 그래도 암암리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그들은 겸손한 사람인지를 뒤늦게 알았다.

전문직이란 노후에 좋은 직업인 것 같다. 팔십대 중반의 의사 출신 노인이 실버타운에 묵고 있었다. 의원을 개설하고 평생 일을 하다가 노년에 실버타운에 들어왔다는 분이었다. 그는 실버타운에서 일주일에 이틀 정도 이웃 노인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노인들은 그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모습이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깨달았다.

내면에 은은한 사랑이 넘치는 노인들도 곱게 늙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생명에 대해 사람과 사물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는 분들을 보았다.

바닷가 모래 위를 걷다 보면 날카로운 낚시들이 더러 보인다. 누군가 밟으면 크게 다칠 것 같다. 그런 낚시들을 줏어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노인을 봤다. 어떤 노인들은 스스로 쓰레기 봉지를 구입해서 바닷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줏기도 한다.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노인들이 있다.

그 반대편에 있는 노인들도 있다. 공동식당에서 자기가 앉던 자리를 남이 차지하고 있으면 비키라고 하며 고집을 부리는 노인들이 있다. 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곳이고 다른 자리들이 텅 비었는데도 양보할 줄을 모른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시비를 걸고 거칠게 싸우는 노인도 있다.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격한 싸움까지 간다. 서로 과거의 지위를 비교하면서 내가 당신보다 못한 줄 아느냐고 화를 벌컥내며 소리치고 싸우는 것도 봤다. 조그만 지적에도 화를 내기도 한다. 속에 화들이 가득 차 있는 폭탄같은 노인들이 있다. 일상의 작은 감정들에 쉽게 휩쓸리는 것 같다. 내면적인 상처가 건드려지거나 누가 자존심을 건드리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자격지심으로 분노하는 경우도 봤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힘이 약하면 쉽게 분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곱게 나이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모나지 않는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게 아닐까.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감정들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인간은 늙어도 사회적 교육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의 목욕탕에서 따뜻한 물이 담긴 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였다. 마주 보이는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기억 서랍을 뒤져 내가 있는지 찾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게 물었다.

“모르는 분인 것 같은데 왜 인사하죠?”

“어색하게 외면하거나 눈을 감는 것 보다 인사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는 마을 노인이었다. 다음부터 그 노인은 멀리서도 나를 보면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세상은 어떤 분위기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매일 가는 목욕탕에는 깔고 앉는 작은 플라스틱 의자가 구석에 포개져 있다. 사람들이 사용한 의자들이 항상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나는 의자를 사용한 후에는 샤워기로 앉았던 자리와 사용한 수도꼭지에 묻은 비누거품을 닦았다. 그리고 그 의자를 원래 있던 자리로 가져가 다시 포개 놓았다. 얼마 시간이 흘렀다. 노인들이 어느새 나를 따라 하는 것 같았다. 요즈음 목욕하러 가면 목욕탕의 바닥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걸 본다. 작지만 좋은 일도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외환위기 때 사람마다 집에 있는 금반지를 가지고 나와 기부한 것도 그런 것 아닐까. 세계가 놀란 우리 국민들의 특징이다.

곱게 늙어가려면 젊어서부터 이웃과 작은 사랑을 나누는 사회적 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선뜻 나서지 못하지 앞서 가는 모범양 역할을 하는 사람만 생기면 따를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