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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계 비화 정주영 (상)

Joyfule 2015. 6. 27. 11:11

 

 

 

제계 비화 정주영 (상)

 

단돈 47전 갖고 가출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이 싫어 18세에 단돈 47전을 들고 가출한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부두 잠역부 철도공사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서울의 한 미곡상인 복흥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직하여 사업과 인연을 맺는다 배달원 3년만인 1935년에 가게 주인이 가게를 차리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주인으로 부터 돈을 빌려 자싲듸 싸전을 차린다 그는 황해도 연백 등지에서 쌀을 사다 팔아 고향에 논 30마지를 살 정도로 싸전이 번창했다 그런데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9년 12월에 쌀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쌀가게가 문을 닫는다

 

그도 쌀가게를 정리하고 그 다음해 서울 아현동에 있는 '아도서비스'란 자동차수리공장을 5.000원에 인수한다 그런데 개업한지 25일만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도색작업을 배우다 기술자들이 퇴근하자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물을 데우려고 화덕에 신나통을 조금 기울려 붓다가 불길에 순식간에 옮겨 붙었다 그는 신나통을 내던질 수 밖에 없었다 눈깜작할 사이에 불이 낡은 목조건물로 옮겨 붙는 바람에 공장이 전소되었다

 

그는 다시 돈을 빌려 신설동 됫골목에 공장을 차렸다 다른 공장에서 열흘걸려 수리하는 자동차를 그는 사나흘에 수리하자 고장난 차가 몰려들었다 그런 기간도 잠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이 강제로 자동차공장을 합병시키는 바람에 또 자동차공장을 잃게 된다 그는 해방직후인 1946년 4월 중구 초동에 있는 적산 대지를 불하받아 자동차수리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이 공장에서는 미군 병기창의 차량 엔진 교체와 고물 일제차 개조작업을 했다 또한 1947년 5월에 헌대토건사를 설립했다

 

어느 날 자동차 수리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던 정주영은 건설업자들이 공사비를 돈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자시은 몇백원을 수금해가는데 건설업자들은 몇천원 씩 받아갔다 그는 이에 자극되어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 그는 서울에 와 공사판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토건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대부분 미군 시설공사를 발주받아 건축업을 시작한 첫해에 1,530만원의 계약고를 기돌했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사 1명과 기능공 10여명으로 운영한 형편인데도 상당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건설업이 나날이 번창하자 1950년 1월에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해 6.25전쟁이 터지면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주영은 미 8군 공병감실 통역관으로 근무하는 동생 정인영 ( 한라건설 창업자)의 도움을 받아 미군 병사 10만명 수용 숙소를 만드는 공사를 따게 되었다 현대건설이 결정적으로 발판을 굳힌 것은 미군 공사를 하면서 부터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정주영도 서울로 왔다.

 

서울에 올라와서 또 미군의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1050년 10월 전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 건물을 개조, 미 8군 전방기지 사령부 본부 막사를 설치하는 공사이다 다음에는 미 8군 휘하 부대가 발주한 부평조병창 보충부대 막사 신축 공사를 수주했다 미군 공사뿐아니라 정부에서 발주하는 긴급복구공사을 수주하게 돤다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낸 것을 계기로 국내 5대 건설사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른바 '건설 5인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사세가 커지자 현대건설은 업종 다각화를 시작했다 정부의 외자물자 보관 창고를 신축하고 창고룔 받는 창고보관업체인 현대상운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정부 외자 물자를 보관하고 월 200만환을 받았다 이 돈은 현대건설의 운영자금으로 활용하게 되었고 한대건설의 자금난 해소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에는금강스레이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세번째로 1962년 2월 충북 단양에 AID 차관으로 시멘트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이어서 현대조선소를 2년 여만에 건설한다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은 세게신기록의 집합소이다. 2년여 만에 건설하고 조선소를 건설하기도 전에 배를 수주한다.

 

이 봐 해 봤어

 

1976년 20세기 역사상 최대의 건설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은 광활했다 이 공사는 전 세계 대부분의 건설공사가 참여한 프로젝트로 현대건설은 마지막 입찰티켓을 극적으로 확보한 뒤 면밀한 계획으로 낙찰에 응해 대형공사를 수주하는 영예를 따냈다. 당시 수주액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절반에 이를 정도, 하지만 사우디측이 국내기술을 믿지 못하자 현대건설은 공사기간을 단축하는 초비상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면서도 당시 외환사정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국내자재를 쓴다 그 중 하나가 거대한 철구조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운반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정화장은 바지선으로 운반하면 수송비가 대폭 줄어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러자 절대로 안된다는 의견이 우세하지 한 말이 "이봐, 해봤어"이다 울산에서 사우디까지 장장 1만2000키로미터, 철구조물을 실은 바지선은 35일간의 대항해를 거쳐 주배일 공사 현장에 도칙시킨다 아산만 물막이 공사에 낡은 배를 이용하는 기발한 아디디어을 여기서도 이용했다 언제난 난 공사에 승부수를 두는 그의 불굴의 의지기 정점을 찍은 것이 쥬베일 공사다 이같은 바지선 운반이 성공하자 그 뒤부터 각종 자재운반의 경우 바지선을 이용했다 무려 35차레나 바지선으로 물자를 수송했다

 

500원 짜리 동전하나로 조선소 건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1971년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조선소 설립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롱바톰 A&P애플도어 회장을 만났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바지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지폐에 인쇄된 거분선 그림을 롱바톰 회장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은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해외 차관에 대한 합의를 얻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주를 찾는 일이었다.

정 전 회장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조선소가 들어설 황량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배를 팔러 다녔고 결국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톤짜리 배 두 척의 주문을 받아냈다. 이 같은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당시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던 우리나라가 세계 조선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시발점이 됐다.

 

최택만 저서 '한국대표급 경영총수의 비화'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