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fule 2024. 10. 27. 01:02

고난에는 끝이 있다

< 앞서 조치하시는 하나님 >

 어린아이가 부모의 조치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 듯이 사람도 하나님의 조치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사람이 어떻게 온전히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 잘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 그때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이해되지 않는 시련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과 계획 아래에 주어졌다고 믿으라. 믿음이 커질수록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대한 믿음이 뚜렷해지면서 감사가 나오게 된다.

 고난과 시련 자체가 복은 아니지만 고난과 시련 중에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있음을 믿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복이다. 또한 고난 중에 자신을 낮추고 죽이면서 은혜 받을 만한 재목이 되는 것도 복이다. 사람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심령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서 겸손해지기가 쉽지 않고 대개 하나님이 마련하신 훈련 과정을 통과하면서 겸손해진다.

 자신을 온전히 죽이면 하나님의 모든 조치를 선하게 여기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은혜는 무엇보다 큰 은혜다. 사람은 예배나 기도를 통해서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때가 많다. 믿을 때도 자신이 죽지 않는 방식으로 믿으려고 발버둥 칠 때가 많다. 그러나 자신을 잘 죽일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특별한 성격과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체험을 한 사람이다.

 죽고자 할 때 산다. 패배를 감수할 때 승리한다. 겸손할 때 높아진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진짜 부자다. 하나님 앞에서는 항복과 행복이 비례한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의 길을 예비하시고 다음 단계의 복을 준비해 놓으신다. 하나님은 아무런 대책 없이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은 몇 수 앞만 읽어도 세상을 단기간에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십 수 앞까지 읽고 앞서 계획하시고 조치하신다.

< 고난에는 끝이 있다 >

 어느 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게 하심으로 양식을 다 끊으셨다(16절). 그 기근으로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했는데 그 전에 하나님은 애굽으로 한 사람을 고난 중에 먼저 보내 야곱 가족의 애굽 생활을 예비하게 하셨다. 그가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이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것은 형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지만 큰 시각으로 보면 먼저 요셉을 애굽에 보내 이스라엘을 향한 원대한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17절).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끌려갈 때 발에 차꼬를 차고 몸이 쇠사슬에 매인 채 끌려갔다(18절). 비록 최종적인 하나님의 승리가 계획되었어도 그 계획을 잘 몰랐던 요셉은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그러나 그의 노예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요셉의 노예 생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단련을 위해 주어진 과정이었다(19절).

 고난에는 끝이 있다.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조차도 영생의 서곡이 된다. 고난 중에 “이제 끝났다!”라는 탄식을 끝내고 심령을 감사로 가득 채우라. 좋은 일도 조만간 끝나게 되지만 나쁜 일도 조만간 끝나게 된다. 일시적인 승리나 일시적인 패배에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지 말라. 지나친 기쁨도 절제하고 지나친 슬픔도 자제하라. 밤이 되면 별이 나온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터널을 지날 때 어느 누구도 어둡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곧 터널이 끝남을 알기 때문이다. 성도의 고난도 조만간 끝난다. 고난의 터널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펼쳐진 것이다. 이제 곧 터널 밖으로 나와 빛의 세계를 맛볼 것이다.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은 찾아온다. 문제를 품고 살지 말고 예수님을 품고 살라. 사람을 의지하면 상처는 필연적으로 주어진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 때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