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기도하는 노년인생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기도하는 노년인생
얼마 전 간이식 수술을 받게 됐다고 하면서 기도해 달라는 친구가 있었다. 열 네살 소년때부터 우정을 유지해 온 동네 친구였다. 그는 사업에 성공을 해서 부자가 됐다. 나이 칠십에 암이라는 초청장을 받으니까 불안해 하고 있다. 나도 암을 통보받고 그런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 온갖 상념과 분노가 나를 괴롭혔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수술 전까지 노트에 시편 23장을 천번 써라.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들이면서 말이다. 그러면 너는 살 거다.”
“당장 할 께. 난 어려서 부터 너를 절대로 믿어.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께.”
그의 신뢰가 고마웠다. 그가 시편 23장을 몰입해서 쓰는 동안 잡념이 없어질 것 같다. 그 걸 통해 나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주술을 걸어놓고 싶다.
몇 달 전 아내와 사별한 친구가 기차를 타고 동해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내게 대처방안을 얻기 위해 왔다고 했다. 대학원장을 지낸 그를 하룻밤 재우면서 관찰했다. 그가 호소하는 내용은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흔한 고민이었다. 재산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큰 고생 없이 자랐다고 했다. 머리도 좋았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됐다. 생활비 걱정이 없을 만큼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런 그가 조금은 가난하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다.
“지금 자네를 보면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자네의 두뇌에 그게 들어가 안착할 자리가 없는 것 같네. 지금의 정신상태로는 어떤 조치를 해도 자네가 실수할 것 같네. 그러니 아무것도 결정하지 말고 우선 내가 시키는 걸 할 수 있겠나?”
“그게 뭔데?”
“공책에 시편 23장을 천 번을 써. 그리고 결정은 그 다음에 하는 게 어떨까.”
내 말을 들은 그는 순간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내가 그에게 내 공책을 꺼내 보여주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 이천번 가까이 쓰고 있어. 이게 바보 짓일까?나 역시 자네 못지않게 공부하고 고시도 합격했어. 그리고 이성과 논리를 다루는 법조인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난 이런 기도의 효력을 믿는 사람이야. 한번 해 보는 게 어떨까? 다 쓸 무렵이면 내면에서 자네에게 답을 말해 주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알겠네, 쓸 께”
먼 친척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세를 끼고 융자를 받아 산 아파트의 임차인이 나가겠다고 하면서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소위 갭투자 비슷하게 아파트를 사고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임차인과 논쟁이 벌어지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변호사인 내가 보기엔 그 앞날이 홀로그램영상같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너 싸우지 말고 먼저 ‘시편23장’을 공책에 천번 써라. 그렇게 하면 그 다음에 내가 도와줄께. 지금 혼자 아무리 펄펄 뛰어도 돈이 없으면 방법이 없다. 다 쓰면 새로운 임차인이 나타날 거다.”
친척 여동생은 내가 하는 말을 믿는 것 같았다. 금세 마음이 편해진 목소리였다.
나는 그들에게 시편23장을 쓰라고 권할 뿐 아니라 실버타운에 와서 이년 동안 이천번을 썼다. 내게는 만 번을 쓰라고 권유한 분이 있다. 목표를 만 번으로 변경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시편을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죄지은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땅바닥에 뭔가를 썼다.
불교에서 만다라를 반복해서 그리는 걸 봤다. 그게 수행이고 그 과정에서 부처님을 만난다고 했다. 나도 시편 23장을 쓰는 과정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여러 형태의 기도를 해 봤다. 교회의 새벽기도가 끝난후 작은 기도방에서 기도해 봤다. 기도원을 다니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산중의 바위에 올라가 기도를 해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암자에서 공부할 때는 예불에 참석하고 종도 치면서 기도하기도 했었다. 마음수련을 하는 곳에 가서 명상을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재자가 있다고 믿는다. 추사 김정희는 한일자를 만번 쓰니까 글자의 끝에서 강물이 흐르더라고 했다. 시편23장을 만번 쓰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기도하는 노년의 인생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