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되려고 했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되려고 했다
초등학교에 벌써 의과대학을 지원하는 그룹이 따로 있다고 들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본성보다 의사가 되고 싶은 열망을 심어주는 것 같다. 정부에서 의과대학의 정원을 증가시킨다고 하니까 기존의 의사들이 반발하고 집단행동에 들어가는 것 같다. 그들은 왜 의사가 되었을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일까.
변호사 생활 속에서 잊혀 지지 않는 의사의 자기 고백이 있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였던 그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그는 의사가 되기로 했다. 여러명의 의사를 대동하고 회진을 돌며 실력을 과시하는 근사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돈이 많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의과대학에 합격하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가 됐다. 부잣집 사위가 되어 처가의 도움으로 의원을 개설했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료를 하면서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독하게 공부했다. 그는 의과대학 교수가 됐다. 그곳은 종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이었다. 의료계 백색 거탑의 안은 남들과 견주고 비교하는 경쟁이 치열했다. 어떻게든 학계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봉건적인 조직의 눈치를 보고 거기에 자신을 일치시켜야 야망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병원장이 되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정상에 올랐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그의 머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렸다.
어느 날 그가 나의 법률상담소를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칠십 평생을 허깨비로 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단골 음식점에서 음식이 식을까봐 걱정해 주는 여주인의 따뜻한 정을 보고 울컥하는 감정이 들면서 뭔가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사랑 없는 냉기 서린 가정에서 보냈다고 했다. 돈과 명예는 얻었지만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했다. 너무 오래 위선적으로 살다보니 자신의 본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인생의 황혼에 그는 이혼을 하고 병원장도 그만두었다. 그는 서울 변두리에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거기서 직접 밥을 해 먹고 자신의 속옷을 빨았다. 그는 비로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것 같았다. 행복을 누리기엔 인생의 여백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와 반대인 경우도 나는 보았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친구가 있다. 중학시절부터 그와 밴드를 만들어 대학까지 음악을 함께 했기 때문에 그를 잘 알고 있다. 대학 일학년 때 그의 노래를 들은 유명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만들자고 섭외가 들어오기도 했었다. 그는 예능인으로서의 유전자를 받은 것 같았다. 삼촌이 해방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였다. 그러나 그의 엄한 어머니는 중학 때부터 그를 의사로 만들려고 세뇌했다. 그리고 그를 기어이 의과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는 이백여개의 뼈의 이름을 원어로 외우는 의과대학의 수업이 싫다고 했다. 그 시간에 노래를 부르고 싶고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다른 유명한 의사의 판박이가 되기 싫다고 했다. 고민하던 그는 의과대학을 용감히 자퇴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 살고 싶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도 칠십이 넘은 노인이 됐다. 나는 이따금씩 그를 만나러 간다. 그의 방에는 그가 치던 베이스 기타부터 여러 악기들이 벽에 기대어 있다. 그 옆방은 그의 아들의 녹음실이다. 대를 이어 그 아들이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하고 있다. 그는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상을 살아보면 성공과 명성이라는 허깨비에 현혹되어 사람들은 자기를 잃고 방황한다. 사람들은 이것이면서 저것이 되려고 한다. 피래미가 상어가 되려는 꿈을 꾸기도 한다. 영혼을 에워싼 온갖 속임수에 놀아난다. 그런 어둠의 세상을 직시할 수 있는 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시작이 아닐까. 탈을 쓰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욕망에 찬 에고가 아니라 하늘에서 받은 본성에 따라 살아야 성숙한 삶일 것이다. 어떤 순간이든 용감하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신성한 불꽃을 태워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