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의 작은 맛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생의 작은 맛
어제는 내가 좋아하는 선배를 만났다. 인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온 분으로 알고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 나이 어느새 일흔일곱살이야. 마지막 남은 시간을 뭘로 채웠으면 좋을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 분은 수재로 최고의 학벌이었다. 관료로 갈 만큼 갔다. 학자적 자질이 있어 유학을 하고 학위도 땄다. 연구소의 책임자로 있었던 적도 있다. 외형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선택받은 극소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득 그가 삶의 자잘한 맛들을 알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작은 기쁨들이 원자 같은 삶의 본질이고 그것들이 모여 인생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자기의 소원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별 게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마지막으로 친한 친구와 바둑을 한판 두어보는 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술 한잔을 마시고 싶어 했다. 외국의 어떤 노인은 다니던 산책길을 다시 걷고 코너에 있는 단골찻집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거라고 했다.
‘성공분석연구소’에서 자기 뜻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을 조사해 발표했다는 글을 읽었다. 그 가운데 한 항목이 ‘맛을 안다’는 것이었다. 눈물 젖은 밥맛을 안다는 것, 잠깐 눈을 붙인 단잠의 맛을 아는 것, 혼자 울어본 눈물 맛을 아는 것, 자살을 부추긴 유혹의 맛을 아는 것, 일 분 일원 그 작은 단위의 거룩한 맛을 아는 것,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사람의 맛을 아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맛을 알며 살아왔을까. 소년 시절과 젊은 시절은 원색의 조금은 천한 맛인 것 같다. 까까머리 중학생 때 변두리 삼류극장이 나의 천국이었다. 몰래 영화를 보고 나와 허름한 중국집에서 사 먹는 짜장면의 맛은 감미로웠다.
군 훈련 시절 행군을 하고 돌아오다 길거리 중국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기름 냄새는 또 다른 삶의 맛이었다. 들어가서 짜장면 한 그릇을 사 먹고 싶은 게 소원이었다. 소년시절의 짜장면과는 약간 질감이 다른 느낌이었다.
결혼 초 쪽방에서 살던 시절 비가 오는 일요일이면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추리소설에 빠져들었다. 배가 고프면 석유풍로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자잘한 기름기가 떠 있는 뜨겁고 짭잘한 국물을 목으로 넘기면서 나는 짜릿한 맛을 느꼈다.
장교 시절 관사를 준다는 바람에 최전방으로 자원해서 갔었다. 평생 처음으로 수세식 변기와 욕조가 있는 내가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얻는 순간이었다. 욕조 속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서 나는 그 맛을 알았다.
환갑 무렵 독충에 물려 피부가 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절실하게 하고 싶었던 것은 대중목욕탕의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는 것이었다. 상처가 낫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탕에 들어가 그 맛을 음미했다. 탕에 들어가도 젊은날과 늙은 날의 맛은 그 느낌이 달랐다. 세월이 흐른 후의 느낌이 조금은 진한 맛이라고 할까.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장교로 있으면서 짜투리 시간에 다시 공부를 하면서 고시에 도전해 합격했다. 그때 긴 고생과 좌절 열등감의 끝에 흘러나오는 눈물의 맛을 알았다. 그 성취의 맛은 혀나 몸이 느끼는 맛과는 달랐다.
변호사가 되어 지붕에 눈이 덮인 지방의 교도소를 찾아간 적이 있다. 성경은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곳에서 징역을 이십년째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소원은 무엇일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아주 단순했다.
비오는 날 교도소 담벼락 아래 먼지 덮인 잡초라도 보면서 산책하고 싶다고 했다. 보고 있어도 그걸 할 수 없는게 감옥이라고 했다. 언젠가 석방이 되면 길거리 허름한 식당에서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를 사 먹고 싶다고 했다.
한겨울 오후 창가의 고드름이 물이 되어 녹아떨어지는 아래서 그의 기나긴 얘기를 들어주고 교도소 문을 나왔다. 눈이 한 두송이씩 날리고 있었다. 되갚을 능력이 없는 누군가를 위해 나의 시간을 선물하는 것도 또 다른 인생의 맛인 것 같았다. 겨울 논길 옆을 걸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밀도 짙은 인생의 맛 같기도 했다.
혼자 외롭게 법정투쟁을 하는 사람과 동행을 하기도 했다. 모략에 빠져 감옥에 있는 사람을 구해내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그런 행위들은 내게 삶의 깊은 맛을 제공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나이 칠십이 넘었다. 황혼과 밤 사이의 짧은 순간 어떤 맛을 즐기면 좋을까 고심하고 있다.
낮에는 해변가를 맨발로 걸으면서 파도가 들려주는 소리와 그게 의미하는 비유를 듣는다. 밤이면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면서 내면 속을 여행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대자연의 맛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해질 무렵 파랗게 물든 눈 덮인 겨울나무를 보는 맛도 괜찮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여백을 무슨 색깔로 칠하면 좋겠냐고 묻는 선배에게 이런 제의를 해 봤다.
“기도하다가 죽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둘은 그렇게 의사의 합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