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찬양하는 시편이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직접적인 통로인 특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간접적인 통로인 일반 계시에는 3대 통로가 있다. 그것은 ‘자연, 역사, 양심’이다. 특히 자연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다.
자연만물 중 으뜸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도 으뜸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장엄한 자연 경관을 보면서 찬탄하지만 사람을 보면서는 더 찬탄해야 한다. 사람이 죄를 짓고 악한 행동을 해서 밉게 보일 때도 있지만 인간 자체에 대해서 ‘찬송하는 의미의 찬탄’은 아니더라도 ‘감탄하는 의미의 찬탄’은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겸손한 찬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더욱 으뜸 피조물답게, 그리고 성도답게 살려고 하라.
하나님은 생명체를 창조해 혼자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그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하찮은 미물도 생명 활동이 유지되도록 섭리하신다. 하물며 구원받은 성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사려 깊은 섭리의 손길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은 변함이 없다.
성도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연약한 생명에 대한 사랑의 간섭에 탁월해야 한다. 물론 겸손한 모습으로 간섭해야 한다. 힘든 사람을 찾아 격려하는 일을 자꾸 미루지 말라.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명을 위해 울고 힘든 사람을 위해 울고 낮은 곳으로 나아갈 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물을 통해 먹을 것도 자라게 하시지만 나무도 풍성하게 자라게 하심으로 그 나무들에 새들이 깃들일 수 있도록 거처와 피난처를 주시는 세심한 사랑의 하나님이다(16-17절). 왜 성도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도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 손길을 기도의 손길로 붙잡으라.
며칠 기도 없이 살면 자책하는 마음이 들지만 몇 달 기도 없이 살면 기도 없는 삶이 체질화되어 자책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그것이 영혼의 위기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겪는 억울함, 불공평, 회한, 상처, 문제, 그리고 답답함 속에 어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을까?” 그 이유는 잘 몰라도 하나님이 어느 때에 애통과 절망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시는 것은 거기서 소망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이 새들의 거처로 무성한 나무를 예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산양이 살 수 있도록 높은 산들을 예비하셨고 너구리들이 피난처로 삼을 수 있도록 바위도 있게 하셨다고 노래했다(18절). 이 말씀은 새와 짐승들에게 피난처를 주신 하나님이 사람에게도 당연히 피난처를 주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위급한 때에는 피난처가 되어주신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어느 날 하늘에 솔개가 나타나자 마당에 한가롭게 놀던 어미닭이 급히 울어댔다. 그때 병아리들이 위기를 느끼고 급히 어미 품으로 파고든 후 한동안 한 마리도 어미 품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미닭의 작은 날개 아래가 많은 병아리들을 품는 대용량의 피난처가 된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품이 적다고 내쫓지 않으시고 우주보다 용량이 크신 품에 다 품어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