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드린 Sanhedrin.
산헤드린 Sanhedrin.
요약 의회'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산헤드린은 여러 기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나, 특히 입법·사법의 최고기관이었던 예루살렘의 대산헤드린을 지칭하게 되었다. 하지만 산헤드린의 정확한 성격·구성·기능은 학문적 탐구와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다. 〈산헤드린〉이라는 소논문을 담고 있는 〈탈무드〉의 자료에 따르면, 대산헤드린은 71명의 현자들로 구성된 법정이었고 종교적 입법기관으로서 '법'은 이곳에서 나와 모든 이스라엘에 공표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왕과 대제사장 임명, 전쟁선포, 예루살렘과 성전의 세력범위 확장 등을 명할 수 있었으며, 사법적으로는 대제사장, 거짓 예언자, 반역죄를 지은 원로, 잘못한 지파를 심판할 수 있었다. 대산헤드린은 66~70년 예루살렘에서 사라졌으나 후일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서 소집되었다.
산헤드린(Sanhedrin)
ⓒ Lkitrossky/wikipedia | Public Domain
정치·종교·사법 등의 기능을 수행한 공식기구였다.
'의회'(synedrion)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산헤드린은 여러 기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나, 특히 입법·사법의 최고기관이었던 예루살렘의 대(大)산헤드린(또는 단순히 산헤드린이라고 불렀음)을 지칭하게 되었다. 또한 사법권과 권위가 약했던 지방 또는 지역 산헤드린도 있었다. 몇몇 학자들은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지배기간(BC 333~165)에 존재했던 게루시아
비록 뛰어난 자료들, 즉 헬레니즘적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그러므로 산헤드린의 정확한 성격·구성·기능은 학문적 탐구와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요세푸스의 저작과 복음서에는 산헤드린이 대제사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적·사법적 의회로 나타나 있는 데 비해, 〈탈무드〉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산헤드린이 정치적·사회적·사법적 기능 전체를 통괄하는 하나의 기구라고 주장하면서 산헤드린의 통합된 기능을 분리해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산헤드린〉이라는 소논문을 담고 있는 〈탈무드〉의 자료에 따르면, 대산헤드린은 특정한 때 예루살렘 성전의 '리시카트 라 가지트'('깨어진 돌의 방'이라는 뜻)에서 모임을 갖던 71명의 현자들로 구성된 법정이었다. 나지와 아브 베트 딘이라고 하는 2명의 의원(zugot)이 이 모임의 의장이 되었다고 한다.
대산헤드린은 종교적 입법기관으로서 '법'(Halakha:유대교 율법의 총칭)은 이곳에서 나와 모든 이스라엘에 공표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왕과 대제사장 임명, 전쟁선포, 예루살렘과 성전의 세력범위 확장 등을 명할 수 있었으며, 사법적으로는 대제사장, 거짓 예언자, 반역죄를 지은 원로, 잘못한 지파를 심판할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속죄일을 포함하여 일정한 의식을 감독했다. 또 대산헤드린은 그 아래 작은 지방 산헤드린을 감독했으며, 마지막으로 상소할 수 있는 최고법정의 역할도 담당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구체적인 설명들이 이상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실적인 기록인지에 대해 학자들은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해석에 따르면 〈탈무드〉의 자료는 성전 파괴(AD 70) 이후 있었던 일들에만 국한시켜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헤드린의 구성에 관해서도 논쟁이 많은데, 논쟁은 2개의 주요당파였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또다른 사람들은 두 집단이 서로 교체하거나 또는 혼합형태로 산헤드린을 구성했다고 주장한다. 〈마르코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요한의 복음서〉
복음서의 이러한 언급은 역사적·신학적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비판적 탐구와 의문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개진하고 있는 어느 이론도 학문적 일치를 얻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산헤드린이 예수의 경우처럼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주도적인 학자들로 구성된 후기 산헤드린은 종교·입법·교육 등을 담당하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최고기관이었다. 또한 정치적인 면도 갖고 있었는데, 최고 지도자인 나지가 로마인에 의해 유대인 정치 지도자(족장 혹은 지배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 산헤드린은 425년 족장제도가 끝남에 따라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산헤드린을 다시 구성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산헤드린의 역사
산헤드린은 구약시대부터 시작하여 A.D. 70년까지 지속되었던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다. 개역개정판에는 ‘공회’라고 번역되어 있다(4:15, 23:1). 총 71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었다.
(1) 산헤드린의 역사
산헤드린 공회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신약, 요세푸스의 기록, 미쉬나(Mishnah) 중 산헤드린 항목에 나오는 랍비들의 구전자료들이다. 미쉬나 1:6에 의하면 산헤드린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장로 70인을 부르신 사건으로까지 소급된다(민 11:16). 그런 장로들의 모임은 구약시대에 계속 있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산헤드린 회의는 셀류쿠스(Seleucus) 치하에서 생겨났다고 보인다. 하스모니아 왕조 치하에서 산헤드린의 권력은 다소 축소되었지만 기구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왕들에게 산헤드린의 회원인 귀족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두개인들이 주도했지만 살로메 알렉산더 여왕(B.C.76~67) 때에는 바리새인들이 주도권을 잡기도 했다. 로마의 통치하에서도 산헤드린은 굴곡을 겪으면서 존속해 왔으나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산헤드린도 마침내 영구히 폐지되었다.
(2) 산헤드린의 권한
산헤드린은 이스라엘의 종교 문제에 대한 것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민사 문제를 처리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총독의 재량에 따라 형사 사건을 재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권은 없었던 것 같다(요 18:31, 행 24~25장).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처럼 현장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일도 있었는데, 이런 일들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 돌발사건이었거나 돌발사건을 가장한 산헤드린의 교묘한 술책이었을 수 있다.
(3) 회원의 구성과 자격
회원은 의장인 대제사장을 제외한 70명의 장로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었다(막 14:53, 눅 22:2, 행 4:5, 6, 25:15).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 출신들이었다. 회원의 자격은 30세 이상으로서 결혼하여 가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지만 바울의 경우처럼 특별한 공헌으로 회원이 될 수도 있었다.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었으며 전직 대제사장들이나 그 가족들이 산헤드린의 지도적 중추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4:5, 6). 재판할 때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앉았으며 죄인을 가운데 세웠다.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와 사법권에 대해 완전한 혹은 준(準)완전의 힘을 부여받은 예루살렘의 의원들 즉 귀족회의는 헬라시대에 명백히 입증된다. 랍비 주석에서 보듯이 그의 희망에 따라 모세에게 주어진 그 시대의 '산헤드린' 즉 칠십인 장로 회의는 사실이며, 그 제도는 모세시대로부터 탈무드시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처음의 천년동안은 그 설립의 흔적이 없다. 때때로 성경에서 백성의 대표로 언급되는 '장로들'은 후기 산헤드린처럼 회의로 조직되지는 않았다. 또한 역대기 여호사밧에 의해 소급되는 설립이나 신명기적 법률제정에 의해 추정되는 예루살렘 최고 법정은 오로지 재판기능의 법정일 뿐이다. 그것은 그레코-로만 시대의 산헤드린처럼 통치에 대한 어떤 본질적인 공유나 지배로써의 원로원이 아니었다.
아마도 페르시아 시대까지 후기 산헤드린과 같은 의회로 존재했거나 점차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그레코-로만시대에도 동일한 상태로 추정된다. 장로들은 일반적으로 에스라의 책에서 그렇게 나타나고, 느헤미야에서는 귀족이나 고위인사로 나타난다. 그들의 숫자나 조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에스라 2:2 = 느헤미야 7:7에서 열두 명은 포로기의 지도자들로 불렸고, 초기 포로이후에는 공동체를 이끄는 열두 지파의 수장으로 불렸다. 반면에 느 5:17에서는 고위인사 150명이 언급된다.
완전히 새로운 헬라의 도시 구성이 설립된 곳은 어디든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민주적인 집회(에클레시아)뿐 아니라 의회(불레)가 있었고, 헬라시대에 유대에는 귀족적 의회인 (게루시아)가 있었다.
유대인의 (게루시아)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대안티오커스 시대에 요세푸스에게서 나타나고, 유대인의 수장으로서 세습된 대제사장이 위치한다. 이는 유다·요나단·시몬과 같은 마카비 시대, 하스모니안 왕조시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동안 (게루시아)에 개혁과 유사한 것이 일어났다. 그 이후에 산헤드린의 구성은 한편의 귀족과 다른 편의 바래새 학자들 사이의 타협으로 대표되었다.
유대 본토에 있는 세 개의 synedria는 예루살렘, 가자라, 여리고에 위치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의회의 권한은 보다 멀리 갈릴리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산헤드린의 용어는 여기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그 이후 여러 차례 예루살렘 의회를 의미했다. 의회에 있어서는 헤롯 아래서 존재 명백한 증거가 있으며, 이전에 노년의 히르카누스에게 부여되었던 것은 오직 산헤드린만이 가능했었다. 헤롯 사후에 아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단지 그의 아버지의 영토의 부분으로 인정했는데, 이와 함께 틀림없이 산헤드린의 권한도 유대 본토에 제한되었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종종 유대 최고 법정, 특히 사법적인 최고 법정으로 나타난다. 미쉬나에서 율법의 최고 법정은 대법정이나 대산헤드린 또는 71인의 산헤드린 또는 단순히 산헤드린이라고 알려졌다. 비록 두세 개의 산헤드린에 대한 논제가 헬라와 랍비 자료와의 상충을 해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무나 불충분하다. 미쉬나에서 71인의 산헤드린은 종교적 지도자들의 단체가 아니라 사법적인 동시에 행정과 통치의 조직으로 힘을 가졌다고 묘사한다. 헬라 자료나 랍비 자료나 모두 이를 대다수 조직으로 보지는 않는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함락이후 산헤드린은 이전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 야브네 법정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중심을 만들지만, 이것은 예전 산헤드린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