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드러난 지옥에 대해
성경에 드러난 지옥에 대해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회와 천주교회를 막론하고 성경적인 지옥과 천국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교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 주된 이유는 지역교회에서 성경에 나오는 지옥과 천국에 대해 올바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성경적인 교사가 매우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성경에 나오는 지옥과 천국에 관한 자료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사탄인 마귀가 성경 번역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오역시켜 천국과 지옥에 대해 잘 알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어둡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지옥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천국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지옥과 천국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갖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 여기서는 지옥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 이를테면 지옥의 종류에 따른 지옥 관련 용어들, 지옥의 필요성, 지옥의 위치, 지옥의 실황, 지옥의 등급 등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알려 주고 있는지 살펴보고 또 그에 관한 것들을 책으로 써낸 저명한 저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1. 먼저 성경에 나타나 있는대로 지옥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지옥 관련 용어들에 대해 살펴보자.
‘지옥’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스올(Sheol)’이라는 히브리말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데스(Hades)’라는 그리스말을 번역한 것으로 신구약성경(히브리어 성경, 그리스어 성경, 영어 성경 등의 경우)에 모두 합쳐 총 54회(시 16:10, 사 14:9, 겔 31:16, 눅 16:23 등) 나온다. 여기 총 54회의 경우에는 ‘지옥’이란 단어가 실제로 쓰인 경우이고, 그 외에도 성경에는 지옥을 묘사하는 표현으로써 영원한 불, 영원한 멸망, 바깥 어두운 곳, 불못, 바닥 없는 구덩이 등과 같은 말이 많이 나온다.
한편,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은 앞의 총 54회에 걸쳐 나오는 ‘지옥’이란 단어 가운데, 구약성경에 나오는 31번의 지옥이라는 단어를 모두 지옥이 아닌 ‘스올’로 표기했고, 신약성경에서는 13번만 ‘지옥’으로 표기하고 나머지는 ‘음부’로 표기했다. ‘지옥’이라는 단어는 ‘지옥’이라고 써 놓아야 옳은 표기이다. 그런데 ‘지옥’이라는 단어를 ‘스올’이나 ‘음부’로 표기하면 옳은 표기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럼 여기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지옥’이란 단어로 번역된 다섯 가지 용어(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아래의 다섯 가지 단어(원어)들은 대부분 우리말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 의미는 서로 차이가 있다.
1) 스올(Sheol)
히브리말인 ‘스올’은 구약성경에 65번 나오는데 흠정역 영어성경은 이 중에 31번은 지옥(hell)으로, 31번은 무덤(grave)으로 그리고 나머지 3번은 구덩이(pit)로 번역하였다. 구약성경 시편 16편에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스올)에 버려 두지 아니 하시고(시 16:10)”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스올은 일반적으로 지옥(hell)을 가리키는 구약성경의 단어이며, 신약성경의 하데스와 같은 의미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행 2:27,31)에서 시편(시 16:10)을 인용할 때 시편에 쓰인 히브리말인 스올(Sheol)이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말인 하데스(Hades)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올은 이 세상을 떠난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장소이다.
2) 하데스(Hades)
그리스말인 ‘하데스’는 신약성경에 11번 나오는데 흠정역 영어성경은 이 중에 10번은 지옥(hell)으로 번역하였고, 1번은 무덤(grave, 고전 15:55)으로 번역하였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가 지옥(하데스)에서 고통받는 중에 눈을 들어 저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더니 나사로가 그의 품에 있는지라(kjv, 눅 16:23)”고 적혀 있다. 이처럼 하데스는 일반적으로 지옥(hell)을 가리키는 신약성경의 단어이다. 한편, 예수님은 인간에게는 두 길과 두 운명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마 7:13) 하데스 안에는 아주 다른 두 운명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위로를 받는 곳인 낙원이고 또 하나는 고통을 받는 곳인 지옥이다. 다시 말해 하데스 안에는 낙원 부분과 지옥 부분의 둘로 나누어져 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는 전자로 갔고, 부자는 후자로 갔다.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데스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아부쏘스(Abussos)
그리스말인 ‘아부쏘스’는 신약성경에 9번(눅 8:31, 롬 10:7, 계 9:1~2 등)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대부분 무저갱(바닥없는 구덩이)으로 번역되었다. 누가복음 8장에 “마귀들이 그분(예수님)께 간청하기를 무저갱(아부쏘스)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kjv, 눅 8:31)”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아부쏘스는 사탄과 악한 영들이 영원한 불못(게헨나)에 던져지기 전에 일시적으로 감금되는 장소이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사탄을 바닥없는 구덩이(아부쏘스)에 던져 넣어 가두고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이 차기까지는 그가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니라(계 20:3).”고 적혀 있다. 이처럼 사탄은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기간 동안 이 아부쏘스에 갇혀 있을 것이다.
4) 타르타루스(Tartarus)
그리스말인 타르타루스는 범죄로 인하여 타락한 천사들을 가두어 두는 장소이다. 베드로후서 2장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루스)에 던져 어두움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벧후 2:4)”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베드로는 지옥(타르타루스)을 타락한 천사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으로 말하고 있다. 유다서 1장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타르타루스)에 가두셨으며(유 1:6)”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지금 흑암(타르타루스)에 감금된 타락한 천사들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불법적인 성적인 죄악에 연관된 거인 종종들로서, 그들의 엄청난 죄는 대홍수를 유발시켰던 것이다.
5) 게헨나(Gehenna)
그리스말인 게헤나는 신약성경에 12번(마 12:8, 막 9:43, 눅 12:5, 약 3:6 등)나오는데 이 중 11번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0장에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게헨나)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 10:28).”고 쓰여 있다. 이처럼 게헨나는 혼과 몸이 둘 다 최종적으로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장소이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이처럼 게헨나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거하는 영원한 불이므로 불못으로도 불린다. 다시 말해 게헨나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몸과 혼이 결합하여 둘 다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지는 최종적인 장소를 말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신구약성경에서 우리말 ‘지옥’으로 번역된 다섯 가지 단어(원어)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 각각을 서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누가복음 강해>, N 크로포드, 전도출판사, 211쪽 / <성경바로보기>, 라킨, 그리스도예수안에, 244쪽) / (<말씀의 올바른 해석>, 존 필립스, 전도출판사, 52쪽).
2. 하나님께서는 지옥을 왜 만드셨는지 그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자.
마태복음 25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위에 밑줄친 ‘영원한 불’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원한 지옥 불못인 ‘게헨나’를 가리킨다. 이곳은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최종적으로 가는 불못이다. 마귀가 타락한 때에 하늘의 천사들 중 삼분의 일이 그와 함께 타락했다. 원래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지옥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곳이 되었다.
성경에는 지옥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죄를 벌하고 격리하기 위하여
베드로후서 2장에 “주께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시험들에서 건질 줄 아시고 또 불의한 자들은 심판의 날까지 예비해 두사 벌할 줄 아시되(벧후 2:9)”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기록되었듯이 불의한 자들은 심판의 날에 자신들의 죄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하실 수 없으신 분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를 영원히 감금하기 위해 필요한 장소로 지옥을 만드신 것이다.
2) 죄인과 의인을 격리하기 위하여
마태복음 25장에 “그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이나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리라(마 25:46).”고 적혀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의인들을 격리시키신다. 인간 사회에서도 사람의 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을 별도로 격리시키듯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악인들을 의인들과 격리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죄인들이 선택한 것을 주기 위하여
요한복음 5장에 “너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나(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쓰여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나오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도 사람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천국을 원하지 않을 경우 그는 지옥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천국과 지옥 바로알기>, 알 레이시, 그리스도예수안에, 361쪽).
상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이유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3. 지옥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 장소에 대해 알아보자.
마태복음 12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서 있었던 것같이 인자(예수님)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중심부(in the heart of the earth)에 있으리라(마 12:40).”
위에서 밑줄친 땅의 중심부라고 번역된 그리스어의 원어인 ejn th'/ kardiva/ th'" gh'"(엔 테 카르디아 테스 게스)에서 그리스어인 ‘카르디아’는 심장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땅의 ‘중심부’ 또는 땅의 ‘심장부’로 번역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다(<옥스퍼드원어성경대전> 마태복음, 제자원, 178쪽). 따라서 영어성경 가운데 우리나라에도 가장 많이 알려지고 번역된 킹제임스 영어성경인 KJV(흠정역 성경)뿐만 아니라, NIV(새 국제역 성경)와 NASB(새 미국 표준역 성경) 등의 성경도 모두 다 영어로 ‘in the heart of the earth(땅의 중심부)’로 쓰여 있다.
물론 킹제임스 영어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한글킹제임스성경, 킹제임스흠정역성경, KJV완역한글판성경 등도 “in the heart of the earth”를 “땅의 중심부 또는 땅의 심장부”라고 올바로 번역해 놓았다. 그러나 나머지 10여 종의 우리말 성경들(한글개역성경, 개역개정성경, 현대인의성경, 쉬운성경, 공동번역성경, 가톨릭성경 등)은 모두 다 “in the heart of the earth”를 “땅의 중심부 또는 땅의 심장부”라고 번역하지 않고 ‘땅 속’으로 번역하였다(단, 회복역신약성경은 ‘땅의 중심부’ 라고 번역하였음).
앞의 내용 가운데 두 가지 번역이 있음을 살펴보았는데, 즉 ‘in the heart of the earth’를 ‘땅의 중심부’라고 번역한 성경과 ‘땅 속’이라고 번역한 성경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번역, 즉 ‘땅의 중심부’라는 번역과 ‘땅 속’이라는 번역에 대해 고찰해 보자.
먼저, ‘땅의 중심부’라고 번역한 우리말 성경들은 그 뜻이 지구의 중심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다음, ‘땅 속’이라고 번역한 우리말 성경들은 그 땅 속이 지구의 중심부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땅 속이라는 표현은 대개 ‘무덤 속’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 속이라는 번역’과 ‘지구의 중심부라는 번역’ 이 두 가지 번역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마태복음 12장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죽으신 후 사흘 동안 땅의 중심부에 계셨음을 알 수 있다(마 12:40).
예수님이 죽으신 후 땅의 중심부에 가신 또 다른 실례를 살펴보자.
누가복음 23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그(강도)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이 말씀은 예수님이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이 무덤에 누워있던 바로 그 날, 그분의 영은 지하 세계인 낙원(하데스)으로 내려가셨다. 따라서 낙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그 낙원이라는 장소는 지하 세계인 하데스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언해서 말하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 중 하나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예수님께 간구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바로 이 낙원이라는 장소가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장소인 것이다(<말씀의 올바른 해석>, 존 필립스, 전도출판사, 46쪽) /<성경바로보기>, 라킨, 그리스도예수안에, 245쪽).
한편, 에베소서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the lower parts of the earth)로 내려가신(descended)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엡 4:9).”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분의 몸이 땅에 누워있는 동안, 그분의 영은 땅의 더 낮은 부분들인 땅의 중심부에 있는 하데스로 내려가셨지, 무덤 속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려간다(descend)는 동사는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낮은 곳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므로, 지표면에 해당하는 무덤 속의 위치에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한 단어이다. 그리고 땅의 더 낮은 ‘부분들’ 이라고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되었으므로, 그곳은 땅의 중심부에 위치한 ‘하데스(지옥 부분과 낙원 부분, 눅 16장)와 타르타루스(범죄한 천사들이 결박당해 있는 감옥, 벧전 3:19)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죽은 자의 거처도 땅 아래 쪽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오는 장면에서, 사울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친숙한 영이 또 사람 모양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했던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이 실제로 나타나자 깜짝 놀라고,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삼상 28:8,11,15)고 물었다. 이처럼 사무엘은 실제로 지하세계인 땅 아래에서 올라오는 장면이 성경에 적혀있음을 알 수 있다(<말씀의 올바른 해석>, 44쪽).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도 바울도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고 쓰여 있다(엡 4:9, 개역개정).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영혼이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혼이 스올(하데스)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시편 16:10과 사도행전 2:27(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실례로 구약성경 에스겔서 3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모두 다 죽음에 넘겨져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과 함께 땅의 아랫부분들로 내려가게 되었음이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지옥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애곡하게 하리니 내가 그를 위하여 깊음을 덮으며 내가 거기에 하수들을 억제시키고 큰 물들로 머무르게 하였느니라. 내가 레바논으로 그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였고 들의 모든 나무로 그를 위하여 쇠잔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그를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과 더불어 지옥에 던질 때 그의 떨어지는 소리에 민족들이 진동하게 하였으니 에덴의 모든 나무, 즉 물을 흡수한 레바논의 아름답고 가장 좋은 것들이 땅의 아랫부분들에서 위로를 받게 되리라. 그들은 또한 그와 함께 지옥에 내려가, 칼로 살해된 자들에게 갔으며 그들은 그의 팔이었고 이방 가운데서 그의 그늘 아래 거하던 자들이니라(겔 31:14~17).”
위의 밑줄 친 구절과 같이 구약성경에서도 지옥과 구덩이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또 땅의 아랫부분들로 내려간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땅의 더 낮은 부분들과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와 관련해서 언급된 지옥과 구덩이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을 엿볼 수 있다.
한편, 한국 기독교인들이 자주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예수님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영 성경이나 한영 찬송가의 표지 안에 들어 있는 사도신경을 살펴보면 모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H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이처럼 원래의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 번역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구절을 삭제해 버리고 말았다(개역성경분석, 그리스도예수안에, 69쪽).
장로교단의 목사인 이광호 교수는 자신의 저서(열매맺는 신앙생활)에서 지금 한국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한 문장이 빠져 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He descended into hell)”는 구절이 빠져 있다. 이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내용인데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그 구절이 왜 빠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 구절을 포함시켜야 한다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열매맺는 신앙생활>, 이광호, 도서출판 깔뱅, 373쪽).
그리고 현대 창조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모리스 박사는 자신의 저서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지옥의 존재와 그 위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매우 두려운 곳으로서 현재 이것을 경히 여기는 사람들은 장차 충분히 경험하게 될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어떤 다른 것보다 지옥의 실제와 공포에 관해 더 많이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는 또 지옥에 관해, 두 가지의 다른 원어가 신약에서 ‘지옥(hell)’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두 가지 단어의 의미와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중 하나는 그리스어로 ‘하데스(Hades)’인데 이것은 구약성경의 ‘스올(Sheol)'에 해당하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의 영들이 거하는 현재의 장소이다. 다른 하나는 ‘게헨나(Gehenna)'인데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거하게 될 장소를 가리킨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말을 한다면 현재의 지옥인 하데스는 땅의 중심부에 있다. 지옥은 또 ‘구덩이(사 14:9, 겔 32:18)’ 또는 ‘무저갱(계 9:2)’으로도 불린다. 하데스에 관한 예수님의 묘사는 이곳이 고통을 의식하는 장소임을 가리킨다(눅 16:23). 또한 성경에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구원받았던 사람들(아브라함과 나사로)도 하데스에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눅 16:25). 물론 그들은 거기에서 편안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초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죽으시고 몸이 무덤에 누워 있는 동안 그분은 영으로 하데스에 가셔서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들을 해방하시고 그들을 하늘에 있는 현재의 ‘낙원’으로 데려가셨다(엡 4:9)고 언급했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헨리 모리스, 전도출판사, 349~350쪽).
지금까지 지옥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1) 서두 부문에 언급했듯이 지옥으로 번역된 네 가지 단어들, 즉 스올, 하데스, 아부쏘스, 타르타루스 등은 의미와 용도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지구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음을 살펴보았다.
2) 게헨나는 서두 부문에 언급했듯이 최종적인 영원한 지옥으로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야할 예비된 불못(the lake of fire)이다(마 25:41).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4. 지옥은 어떤 곳인지 그 실황에 대해 알아보자.
1) 먼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지옥의 실황에 대해 살펴보자.
“어떤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 호화롭게 지내는데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있어 헌데 투성이인 채로 그 부자의 문전에 누워서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더니,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 그 일 후에 그 거지가 죽었는데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 안으로 옮겨졌고, 그 부자도 죽었으며 장사되었더라.
그가 지옥(하데스)에서 고통 받는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 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그가 울부짖어 말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시어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내 혀를 시원하게 하소서, 이는 내가 지금 이 불꽃 중에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니이다, 하나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네 생전에 선한 것들을 받았고, 이와 같이 나사로는 악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고통을 받고 있느니라. 이 모든 것 이외에도 우리와 너 사이에는 크고 깊은 구렁이 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너희가 우리에게로 건너오고자 하여도 올 수 없느니라, 하니(눅 16:19~26).”
앞의 누가복음 1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단 한 번 지옥을 가리고 있는 휘장을 뒤로 젖히시고 우리에게 지옥이 어떤 곳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지옥에서 긍휼을 요구하면서 물을 달라고 애걸하며 자신의 눈을 치켜 올리고 있는 불쌍한 부자를 보면서 우리는 지옥이 실제적이며 문자 그대로 존재하는 장소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성경의 내용은 실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지옥은 문자 그대로 존재하는 장소이며 고통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성경은 이 지옥이 우리가 사는 이 지구(땅)의 중심부에 위치한다고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천국과 지옥 바로알기, 알 레이시, 그리스도예수안에, 218쪽).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 16장을 통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그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과 지옥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한글판 킹제임스 성경은 누가복음 16장 23절(그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에 나오는 하데스를 모두 지옥으로 올바로 번역했다. 그러나 나머지 10여 종의 우리말 성경들은 하데스를 제각기 다르게 번역해 놓았다.
이를테면 한글개역성경, 개역개정성경, 회복역성경 등은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하지 않고 ‘음부’로 번역했다. 가톨릭성경은 지옥으로 번역하지 않고 ‘저승’으로 번역했다. 공동번역은 ‘죽음의 세계’로 번역했고, 현대인의성경, 표준새번역, 쉬운성경은 ‘지옥’으로 올바로 번역해 놓았다.
앞에서 지옥으로 번역하지 않고 ‘음부와 저승’으로 번역해 놓은 잘못된 번역들(한글개역성경, 개역개정성경, 회복역성경, 가톨릭성경 등)이 있는데, 이 음부와 저승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말 큰 사전에서 음부는 저승인데, 저승은 ‘죽은 혼령이 가서 사는 세상으로 구천 또는 유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음부와 저승’은 불교 용어인데, 말하자면 번역자들이 불교의 개념을 기독교에 도입했는데 이런 이교도 사상이 성경 번역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개역성경분석, 그리스도예수안에, 67쪽).
서두 부문에 언급했듯이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에 ‘지옥’이라는 단어가 총 54회 나오는데, 개역개정성경은 이 중에 구약에 나오는 31번의 지옥이라는 단어를 모두 지옥이 아닌 ‘스올’로 표기했고, 신약성경에서는 13번만 ‘지옥’으로 표기하고 나머지는 ‘음부’로 표기했다. ‘지옥’이라는 단어는 ‘지옥’이라고 써 놓아야 옳은 표기이다. 그런데 ‘지옥’이라는 단어를 ‘스올’이나 ‘음부’로 표기하면 옳은 표기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말 개역개정성경 외에 나머지 성경들도 거의 대부분 개역개정성경과 대동소이하다. 여하튼 사탄인 마귀는 지옥을 부단히 숨기려고 노력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음부에 갑니다.’라든지 혹은 ‘스올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제대로 알아들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이교도 사상이 개역개정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참으로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앞의 책 67쪽).
2) 다음으로 여러 사람들의 지옥 체험에 대한 가짜 간증에 대해 알아보자.
예나 지금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꿈이나 계시나 환상 등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고 증언한 것을 보게된다. 이러한 ‘천국과 지옥 체험 간증’에 대해 올바른 비평을 해놓은 기사를 살펴보자.
국내 기독교 1등 신문인 크리스천투데이는 2012년 11월 26일 기사에서 김성봉 목사(전 안양대 신학대학원 원장)가 ‘한국교회 이단·사이비 운동 비평’ 심포지움에서 발제자로 나서 ‘천국, 지옥 방문 신드롬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목사는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는 이들은 하나같이 꿈에서 본 것을 대단한 신빙성을 가지고 말하는데, 그러한 자세 자체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기본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인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꿈 꾸는 자들의 이적과 기사를 비판한 성경 구절(신 13:1~3, 렘 23:25~28)을 예로 들며 “성경 기록과 체험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점으로 인해 성경론, 구원론, 종말론 등에 있어서 심각한 오해나 오류를 가져오게 된다”고 비판했다.
또 김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회자 혹은 설교자라면 단상에서 성경 이외의 내용을 말하고 가르칠 권리가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라며 “특히 개혁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그 자세를 분명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혁교회의 강단의 특징은 말씀이 가는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데서 멈추는 것이다. 오늘날 마치 유행병처럼 번지는 천국 혹은 지옥을 다녀온 이야기들을 강단에서 하는 일은 개혁교회임을 자처하는 교회의 강단에서는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크리스천투데이>, 2012 11 26).
한편, 국내 기독교 최대의 인터넷 신문인 뉴스앤조이는 2012년 11월 28일자 기사(기사 제목: 천국과 지옥 간증은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한 협박)에서 김성봉 박사(대신총회신학연구원 교수)가 ‘천국과 지옥의 간증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오늘날 천국과 지옥 방문 이야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했다.
김 박사는 우선 “신앙생활에서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나 불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점에서 천국과 지옥의 실재성을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가 천국과 지옥의 실제성을 말하는 것을 넘어 신자들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체적 내용을 말하다보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전도·헌금·봉사 등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 천국 변두리에 살거나 지옥에 간 사람 이야기라든지, 열심히 신앙생활한 신자가 예수에게 칭찬받았다는 이야기 등이 그 예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성경적으로 무지한 신자들의 열심을 끌어내기 위한 협박용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김 박사는 “어떤 신앙적 체험이든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기록인 성경이 서술하고 있는 이상의 것을 하면 성경의 권위는 사라질 것이다”고 염려했다(<뉴스앤조이>, 2012 11 28).
위의 기사 내용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사람들의 ‘지옥 체험 간증’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성경에 그러한 사례가 나타나 있지 않다. 성경에는 오직 단 한 번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언급하신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지옥의 실제 상황 외에는 없다.
5. 지옥의 등급에 차등이 있는지 없는지 그 등급에 대해 살펴보자.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더라.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위의 밑줄친 구절 가운데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더라’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이 분명한 사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 그들의 행위가 열거되어 있는 책들에 따라 평가를 받고 그 다음에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못’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가야 할 최종적인 지옥을 가리키는데, 이 지옥의 형벌은 개개인의 죄상에 맞게 등급이 매겨져 있는데 그 등급에 따라 지옥의 등급이 정해지게 된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354쪽).
어느 국가든 각 나라마다 제정한 법이 있고, 또 그 법에 따라 죄에 대한 등급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절도죄와 살인죄의 경우에 통상 살인죄가 더 무거운 형벌을 받는다. 성경에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쓰여 있다. 이 말씀은 ‘심는대로 거둔다’는 법칙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9장에 “나(예수님)를 네(빌라도)게 넘겨준 자(유다)에게는 더 큰 죄가 있느니라 하시니라(요 19:11).”고 쓰여 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다의 죄는 더 큰 죄라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4)”고 쓰여 있다. 여기 ‘보다 견디기 쉽다’는 것은 형벌의 차이를 뜻한다. 상기의 성경 내용들을 살펴볼 때, 만약 지옥에서의 형벌에 차이(등급)가 없다면 심판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신들이 행한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종 지옥에는 형벌의 등급이 있기 때문이다(천국과 지옥 바로알기, 329쪽).
예수님은 최종 지옥인 게헨나에 대해 직접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게헨나)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 나오는 지옥은 하데스가 아니고 게헨나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데스를 다섯 번 그리고 최종 지옥인 게헨나는 열한 번 언급하셨는데 단 한 번도 하데스와 게헨나를 혼동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하데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항상 땅의 중심부에 있는 세계 즉 보이지 않는 지하 세계를 의미했다. 그리고 ‘게헨나’에 대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항상 죄인들의 최종 거처에 대해 말씀하셨고, 또한 게헨나를 언급하신 열한 번 중에서 일곱 번은 분명하게 죽은 자의 몸이 거기에 있다(마 5:29,10:28,18:9 / 막 9:43~47)고 말씀하셨다(앞의 책, 232쪽).
6. 결론
지금까지 성경적인 지옥에 대해 여러 가지를 살펴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지옥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시고 그 두려움에 대해서도 엄중하게 경고하셨다. 이를테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최종 지옥인 불못에 던져질 것이고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3:50).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 말씀처럼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살아있을 때에 성경적인 지옥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영원한 지옥 불못에 가지 않도록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영적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신자들은 서두에 언급했듯이 성경적인 지옥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또 구원은 받았지만 성경적인 지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성경적인 지옥에 대해 올바로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성경적인 지옥과 천국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교회가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옥과 천국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교회가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론과 그리고 성경적인 지옥과 천국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