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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잣대로 지금을 잴 수 없다 - 김진영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Joyfule 2021. 5. 16. 23:26


그때의 잣대로 지금을 잴 수 없다김진영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시대에 짓눌렸던 90년대 젊은이들, ‘행복’ 말하는 것도 사치였는데

성공보다 낙오않는게 절실한 지금 20대, 사소할수록 더 ‘공정’ 따져
대의보다 ‘소확행’, 위선 대신 ‘쿨함’… 젊음의 화두는 젊은이들 것

 

오래전 교수들 사이에서 오가던 우스갯소리가 있다. 

젊었을 땐 아는 거 모르는 거 다 가르치고, 그다음엔 아는 것만 가르치고, 그다음엔 필요한 것만 가르치고, 

맨 나중엔 기억나는 것만 가르친다는 얘기였다. 

나이 든 분들이 킬킬 웃으며 얘기할 때, 젊은 나는 옆에서 멋모르고 따라 웃었다.

 

옛날 강의록이나 강의 계획서를 보면, 선배 교수들이 나눴던 그 농담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었음을 알겠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갈수록 강의 노트는 빽빽하고 성실하다. 

어디선가 많이도 주워섬겨 놓았으니, 모르는 것까지 가르치려 들던 설익은 시절의 흔적일 테다. 

학생들은 초년병의 과욕을 다 받아들여 주었다. 

당시 학생기록부는 손으로 작성했다. 

기록부에 ‘장래 희망’ 항목이 있었는데, 

외국어 문학 전공생은 대부분 외교관, 통번역사, 언론인, 교육자 등을 써넣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유학 온 한 남학생(통일교도라는 설)의 카드에는 서툰 글씨로 ‘행복해지는 것’이라 적혀 있었다.

 과연!

/일러스트=박상훈

 

90년대 한국 대학생에게 ‘행복’은 결코 공표할만한 인생 목표가 아니었다. 

소련 붕괴의 충격, 반미·반자본·통일 투쟁의 여진,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도 같은 공동의 부채감이 그림자를 드리웠고, ‘사회적 대의’의 중력은 여전했다.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막연한 컨센서스가 있었다. 

소설가 윤후명 선생을 강연에 초청했더니만, 

학생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호소하며 졸업 후 진로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선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여러분, 라면이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그때 다 함께 폭소를 터뜨리며 라면에 마지막 희망의 고리를 걸던 그 학생들이 바로 지금의 40대 세대다.

 

그 후 시간의 강은 흘러 나는 아는 것, 필요한 것만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때론 기억나는 것만 가르치는 것도 같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나이 듦의 척도는 다름 아닌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변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도 바뀐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만 가르친다는 것은 학생들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 적응해나가는, 꽤 부지런한 작업이다. 

교육은 선생이 생각하는 ‘필요’와 학생이 원하는 ‘필요’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요즘 학생들의 화두는 공정이다. 기준은 분명하고, 과정은 투명하며, 예외 규정에는 근거가 따라야 한다. 

경우 바른 그들은 사소한 것에, 어쩌면 사소한 것일수록 목숨 걸고 따진다. 

가령, 출결 체크가 제대로 되었는지, 지각 횟수가 올바로 적혔는지 말이다.

뒤에 앉아 딴 일 하면서도 강의실(비대면 포함)에는 꼬박꼬박 들어온다. 

90%에 해당하는 공부 내용이 아니라 10%도 안 되는 형식 요건에 더 신경 쓰는 태도다. 

왜 그럴까?

 

‘공정’은 ‘불공정’의 상대어지만, 실은 ‘경쟁’의 개념적 파생어다. 

어릴 적부터 경쟁의 트랙을 달려온 그들에게는 어떻게 성공하느냐보다 어떻게 낙오하지 않느냐가 더 절실하며,

 비록 태생적 스펙(천재성, 경제적 배경 등)은 어쩔 수 없다 쳐도 후천적 스펙(요건 충족, 자격 취득 등)만큼은 

뒤지지 않겠노라 각오한 터다. 

남들이 하는 것은 빠짐없이 해야 하고, 시험에서는 절대 실수하면 안 되고, 

1점짜리 봉사 점수, 별 의미 없는 증명서까지 긁어모아야 한다. 

경쟁은 치열하고, 당락은 소수점에서 갈릴 수 있음을 오래전 터득했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불안’이 오늘의 20대를 잠식하고 있다. 

삶이 죽음보다 두렵다는 말이 쉽게 나온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국가고시를 목표 삼으면서도, 공무원이 꿈인 사회가 불행하다고 한편으로는 인정한다. 

공무원 입성은 경쟁과 불안의 종식을 의미한다. 

그들은 ‘리더’ ‘엘리트’라는 말을 거부하고, ‘사회적 대의’의 고민을 멀리하며, 

대신 소시민의 ‘소확행(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택한다. 

‘찌질함’의 상상조차 혐오하는 그들에게

 ‘라면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식의 조언은 영락없는 꼰대 발언이다.

 

그들은 정치 논쟁 싫어한다. 

현 정치 사회현상에 빗댄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다 알고 판단한다. 

‘피로사회’의 일원인 20대가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는 치유와 힐링, 환호하는 단어는 솔직 담백과 쿨함이다. 

거대한 담론이나 위선적 감상은 ‘노잼(재미 없음)’으로 일축해버린다.

 

체호프 단편 중에 ‘노년’이라는 작품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을 찾은 사람이 옛 지인을 만나 과거를 되새기는 내용이다.

“지금의 잣대로 그때를 잴 수 없지요”라는 말이 거기 나온다. 

맞는 말이다. 

한마디 더 보태자면, 그때의 잣대로 지금을 잴 수도 없다.

 

/ 조선일보 [자작나무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