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2060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혼의 별나라 여행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혼의 별나라 여행   일주일 사이에 여러 명이 죽었다. 고교동창의 부고도 있고 친구의 부인이 죽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까 더 이상 죽음이 생소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죽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훌쩍 먼 나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경을 보면 인생 칠십이고 강건해도 팔십이라고 한다. 백세시대라고 말은 하지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수명은 칠십대에서 대충 끝이 나는 게 아닐까. 나는 운 좋게 기본적인 수명은 확보했고 지금은 하루하루를 보너스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산다는 게 뭘까. 진짜 살아있으려면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나는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본다. 사십대 중반까지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자아가 강했다. 그러다 암을 선고받고 수술대 위에서 깨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버려진 천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버려진 천재   그가 타슈겐트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떨어지는 낙엽은 자리를 가리지 않는 것일까. 그가 머나먼 생소한 나라에서 끝을 맺었다. 그가 눈을 감을 때 혹시 그 여자가 옆에 있었을까. 그는 불운한 천재였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먹구름이 끼었던 인생이었다. ​어느날 그는 다섯살 때쯤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피를 토해내듯 말했다. 그날 엄마 손을 잡고 사람들이 붐비는 재래 시장을 갔었다고 했다. 어느 순간 엄마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진 듯 발을 동동거리며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보면서 모두 안타까운듯 혀를 찼다. 몇 시간을 울면서 눈물 콧물이 얼굴에 범벅이 됐을 때 바로 그 앞 양복재단을 하는 가게 남자가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부터 그는..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여장군 할머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여장군 할머니   변호사를 하면서 사십년 가까이 죄인들과 만났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판사 앞에서는 반성했다고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해요.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예요.나는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이 아프지를 않아요. 남들은 아프다는데 나는 왜 그렇죠?”​그렇게 말하는 그는 진심이었다. 악마가 스며들어 양심을 제거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평생을 도둑질만 해 온 사람과 얘기를 했었다. 그는 어려서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은수저를 훔친 것을 시작으로 팔십 노인이 돼서도 전원주택을 털러 다니고 있었다.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있을 때에도 그는 그 짓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도벽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웃으면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결혼의 의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결혼의 의미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독히 싸우는 전쟁터에서 자라났다. 두 분은 본질적으로 가치관이 다른 분이었다. 어머니는 출세한 사람이나 부자를 부러워했다. 평생 가난한 말단 회사원인 아버지를 원망하고 무시했다. 아버지의 침묵 속에는 그런 어머니를 속물로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있었다. ​아침은 어머니의 승리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떤 노골적인 모멸도 돌부처 같이 묵묵히 들으면서 감수했다. 그러다 저녁에 술이 들어가면 광분했다. 온 집안이 부서지고 집기가 날아갔다.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함경도 에서 자란 어머니는 후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악다구니를 하면서 끝까지 덤비다 피를 흘리기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이 왜 결혼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식..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정치거물 앞의 무력한 판사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정치거물 앞의 무력한 판사들   야당 대표 이재명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는 결정문에서 그가 개발 사업에 관계가 있었다고 볼만한 상당한 의심이 있다고 했다. 유죄의 심증이다. 위증교사 혐의도 소명됐다고 했다. 증거인멸을 시도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판사는 당대표이고 직접 증거가 부족해 구속하지 않는다고 했다.​담당 판사의 결정문은 세상의 눈과 몸보신 사이를 법기술적으로 비겁하게 빠져나간 것 같다. ​일반 형사범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절규했다. 어떤 직접적인 증거도 없었다. 재판장은 중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직접 증거가 있어야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법은 정황증거만 가지고도 실체적 진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변호사로서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괜찮은 불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괜찮은 불륜   변호사사무실을 오랫동안 하면서 수많은 사랑에 관한 사건을 경험했다. 그중에서 결혼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사건 하나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한 언론인이 방송에 출연했다가 사회를 보던 여성 아나운서와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유부남과 유부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은밀한 만남이 발각됐다. 남편은 여성 아나운서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리고 그 언론인을 상대로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라는 위자료 소송을 제기했다. ​어느 날 그 여성 아나운서가 유서를 써놓고 한강으로 갔다. 두 남자가 그 사실을 거의 동시에 알게 됐다. 그 여성은 진짜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성격이었다. 여자가 죽음의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 시각 두 남자의 행동이 달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늙는다는 것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늙는다는 것   사람들이 파도같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지하철역 계단 가운데 한 노파가 쭈그리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살아온 삶이 투명한 배경 화면처럼 배어있는 느낌이다. 어느 날이었다. 그 노파가 독오른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글쎄 저년이 나보고 젊어서 뭘 했길래 이렇게 사느냐고 그래요. 그래 야 이 년아 너도 늙어서 나같이 되라”​그 노파는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오십년 세월 저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십대 초 깊은 산골 절에서 묵을 때였다. 그 절의 마당 구석에 벌통이 놓여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마당을 거닐다가 벌통 아래서 꿈틀거리는 것들을 보았다. 다가가서 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검은 은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검은 은혜   기억의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고통의 기억들이 마음속 강물 위를 둥둥 떠내려오고 있다. 마주하는 첫번째 고통의 얼음덩어리 속에는 이십대가 스산하게 저물어갈 무렵의 내가 들어 있었다. 나는 부천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의 맨 뒷좌석에서 차창 밖을 보고 있었다. 짙은 절망감이 검은 안개처럼 온 몸에 퍼지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이 나의 꿈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남들이 대학생이 되어 즐겁게 어울려 놀 때 어둠침침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고시원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사랑대신 야망을 품고 암자의 뒷방에서 뒹굴었다. 더 이상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들판에 홀로 남겨진 허수아비처럼 나만 덩그라니 혼자 남아 지나가는 바람에게 절망을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안 될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성공의 진짜 비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성공의 진짜 비결   사업을 하면서 갑자기 부자가 된 고교 동창이 있다. 그의 고급 별장에 동창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운 친구에게 큰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기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학문을 하는 친구들의 연구비도 지원하고 사회단체에도 큰돈을 기부하곤 했다. 고등학교시절 그와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나는 자그마하던 그가 그냥 모범생이었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공인회계사가 되어 대형로펌에 고용되어 일한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어느 날 그가 나의 사무실로 놀러 왔다. 격의없이 다가가는 성격 같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호기심으로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됐어?”​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적인 자기완성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적인 자기완성 원로 탈랜트인 정한용과 점심을 먹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친구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바닷가 한적한 실버타운에서 고독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지만 나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걸 실감해. 내가 탈랜트를 하고 또 국회의원을 해서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졌지만 내면은 고독해. 너는 연극배우들이 막이 내린 후에 텅 빈 객석을 보면서 느끼는 공허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뜯을 때 배우들이 막 울기도 한다구. 나도 내 공허를 메꾸기 위해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고 떠들고 그래. 그래도 그 속에서 나는 짙은 외로움을 느끼는 거야”​ 인간의 내면은 겉이 어떻든 보랏빛 노을인 것 같다. 그와 헤어지고 나는 기차를 타고 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죽기까지 하고 싶은 일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죽기까지 하고 싶은 일 화면에 유명한 여성 연극배우가 나와서 앉아있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의 발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뇌종양으로 큰 수술을 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세월에 풍화되는 존재인 것 같다. 죽음을 앞 두고 있는 듯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일주일을 살아도 나답게 살고 싶어요. 무대 위의 나를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죽기 전에 ‘짠’하고 뭔가 보여주고 싶어요.”​ 이어서 그녀는 자신이 연습한 아리랑을 몇 소절 청승맞게 불러제꼈다. 그녀가 덧붙였다.​ “우리 엄마도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러면서 ‘죽을 때 죽더라도 일해야지’라고 하셨죠.”​ 오래전 소송업무관계로 그녀의 오피스텔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서가에 연극 대본들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새로운 자본주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새로운 자본주의 묵호역 플랫폼 주위는 엷은 어둠이 출렁거렸다. 밤 기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군데군데 서너명씩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의 공동식당을 담당하고 있는 그녀가 끼어 있었다. 시골출신인 그녀는 열 살부터 밥을 지어 아버지가 일하는 밭으로 가지고 갔었다고 했다. 그렇게 밥짓는 일과 인연이 되어 나이 칠십이 넘은 지금까지 평생 밥 짓는 일을 해 왔다는 것이다. 낮에 식당에서 봤었는데 한밤의 플랫폼에서 만나니까 느낌이 다르다. 평소에 입이 무거운 그녀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십년 전 황량한 묵호의 산골짜기 실버타운으로 와서 밥을 하기 전에는 서울의 충무로에서 작은 밥집을 했었어요. 영화판인 그 동네에는 끼니때 밥을 사 먹을 돈이 없는 배우들이 많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받아들임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받아들임 법무장교생활을 같이 한 친구가 있었다. 일주일에 영어소설 한 권씩을 읽는 노력파였다. 그가 낸 번역서도 여러 권 있었다. 그가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그는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다. 미세한 기생충알이 뇌수가 흘러내리는 관을 막아 뇌압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는 뇌수술을 받았다. 뇌수술 후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나는 친구인 그를 데리고 서울대 안과로 갔었다. 안과의사는 실명을 선언했다. 나는 그래도 입원을 시켜서 수술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의사에게 부탁했다. 담당의사는 그를 입원시키면 회복이 가능한 두명의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섭섭했지만 의사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을 처음 산 손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글 빵을 처음 산 손님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한 시사잡지로 부터 수필의 원고청탁을 받았다. 나는 고심하며 며칠간 썼다. 문학적인 글은 처음이지만 잘 썼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판결문, 변론문도 써 봤는데 붓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을 못 쓰겠나 싶었다. 며칠간 고심해서 쓴 원고를 가지고 잡지사 편집장에게 갔다. 그가 내 원고를 잠시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 “저하고 잠깐만 저리로 가시죠”​ 그는 잡지사 구석에 있는 칸막이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가 탁자 위에 나의 원고를 놓더니 의견을 얘기했다.​ “저는 우리 잡지의 귀한 지면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글의 도입 부분을 보니까 공자를 인용하셨네요. 왜 본인만의 것을 담지 않으십니까? 다시 써보시죠.”​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손실위험이 없는 투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손실위험이 없는 투자 살아오면서 어떤 순간이 즐거웠을까.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간적인 연애도 달콤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묵은 된장같이 깊은 맛을 내게 준 것이 책읽기다. 세월 저쪽에 있던 기억 한 장면이 꿈틀거리면서 기어 나오고 있다. 이십대 중반 신촌역 부근의 쪽방에 세 들어 살 때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추리소설에 빠져있었다. 점심 무렵 석유풍로에 냄비를 올려놓고 인스턴트 우동을 한 그릇 끓여먹으며 소설을 계속보고 있었다. ​ 죽은 아내의 복수를 한 주인공이 경찰에 쫓겨 골목길로 도망치고 있었다. 감정이입이 된 나는 고독한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오후에 책을 다 읽었다. 비는 계속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