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글] 30년 만에 다시 읽는 名文
이 땅의 모든 양심적인 애국적 지식인이 좌익으로부터의 핍박이 두려워 좌익의 도전을 경고하지 못하고 우익의 궐기를 촉구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장래가 너무 암담하다.
이 글은 양동안 교수가 1988년 <현대공론> 8월호에 발표한 것입니다. 좌익 세력의 정권 및 사회 주도권 장악 및 우익 세력의 지리멸렬을 28년 전에 예견한 명문(名文)으로서,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모색해 보고자 양 교수의 허락을 얻어 미래한국에 게재합니다. 중간제목은 미래한국에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달았습니다. 지면에 게재된 내용은 글의 전반부이며, 전문은 미래한국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좌익의 세력이 이같이 확대되고 좌익의 목소리가 이같이 커지고 있는 데도 이 나라의 우익은 그에 대해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명백한 공산주의자를 ‘양심세력’이라 부르고, 좌익인물을 ‘용공(容共)분자’로 규정하면 ‘용공조작’이라고 떼쓰면서, 국민에 대해 반공을 포기하고 이 나라에 대해 반공국가이기를 그만두라고 요구하는 좌익의 목청 높은 주장에 대해 우익은 반론 한번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진정 우익 지배 국가이며 반공국가인지가 의심스럽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좌익세력이 사회 각 분야에서 치열한 사상적·조직적 공세를 전개하고 있다. 정부나 언론이 ‘좌경(左傾) 세력’이라고 관대하게 불러 주고 있는 이 나라의 좌익은 때로는 민주주의 세력으로, 때로는 민족주의 세력으로, 또 때로는 순수한 양심세력으로 자기들을 위장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 침투하여 자기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좌익세력은 대학을 장악하여, 대학 캠퍼스를 혁명의 요새로 만든 지 오래다. 그들은 각 대학의 학생회와 대학신문·대학방송국 등을 장악하여 학생들을 선동, 소요행위에 끌어넣고 있으며, 교수들을 겁주어 그들의 행위에 감히 맞서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는 통에 교수들 사회에서도 좌익 교수들이 대학 좌익 학생들의 조직적 지원을 받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좌익세력에 이미 장악된 또 한 분야는 노동자 사회이다. 좌익은 이 나라 노동자들을 혁명의 주력으로 만들기 위해 이미 1970년대부터 노동자 사회에 침투했다.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빈곤과 소외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에 접근하여 그들을 의식화하기 시작했을 때 노동자들은 그들의 의식화작업에 쉽게 끌려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대부분의 하층 노동자들은 좌익을 그들의 진정한 동맹자로 알고, 그들의 지휘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물론 그들 중 절대다수는 자신들의 행동이 좌익의 혁명 전략에 따르는 것인지를 모르면서 행동하고 있다.
좌익은 대학가와 노동자 사회 이외에도 문화예술계·언론출판계·종교계·교육계 등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침투하여 그들의 세력을 부식·확대하고 있다. 추측컨대, 야당은 물론이요 여당까지도, 심지어는 관계와 법조계에도 좌익이 침투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좌익은 활보, 우익은 고개 숙이고 다녀
이처럼 각 분야에 침투한 좌익은 각 분야에서 민주주의자·민족주의자·양심인사로 자처하면서 주변 인사들의 반공의식을 약화시키고 반미(反美) 감정을 고조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좌익 문필가들은 글이나 말을 통해 불특정 다중(多衆)에게 반공의식을 약화시키고 반미감정을 북돋우는 활동을 하고 있다. 좌익이 각 활동영역에서 반공의식을 약화시키고 반미감정을 고조시키는 목적은 국민의 반공의식과 한미 유대가 남한의 사회주의혁명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이기 때문임을 더 말할 것이 없다.
지난 수년 동안 이 나라가 권위주의적이고 도덕성이 의심스런 세력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만 되면 좌익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대폭 진전된, 그리하여 각 분야에서 무정부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좌익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세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좌익에 동조하는 비(非)우익의 숫자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좌익세력 자체는 민주화 진전으로 얻어진 합법적 활동공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그들의 세력을 확대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좌익의 세력이 이같이 확대되고 좌익의 목소리가 이같이 커지고 있는 데도 이 나라의 우익은 그에 대해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명백한 공산주의자를 ‘양심세력’이라 부르고, 좌익인물을 ‘용공(容共)분자’로 규정하면 ‘용공조작’이라고 떼쓰면서, 국민에 대해 반공을 포기하고 이 나라에 대해 반공국가이기를 그만두라고 요구하는 좌익의 목청 높은 주장에 대해 우익은 반론 한번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진정 우익 지배 국가이며 반공국가인지가 의심스럽다. 좌익은 활보하고 우익은 고개 숙이고 다니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두고 누가 우익 지배사회요 반공사회라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이 나라에서 우익 인구와 좌익 인구를 맞비교하면, 우익 인구가 압도적인 다수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좌익세력은 이 같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면 이 나라 사상계를 좌익 우세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특히 지식인이나 준(準)지식인으로 구성된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신통술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좌익의 신통술은 주로 그들의 조직력과 연대의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좌익의 무기는 ‘강한 연대감’
좌익은 혁명이라는 공격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또 그들이 따르는 이데올로기와 각국에서 성공한 좌익혁명의 경험이 그들의 조직력을 강하게 해 주고 있다. 그들은 각 활동분야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비록 수적으로 열세라 할지라도 강한 조직력으로 인해 해당 활동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그에 반해 우익은 비록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각 활동분야에서 좌익의 헤게모니 장악을 저지하지 못한다.
좌익은 또 연대의식이 강하다. 궁극적으로 혁명, 그리고 단기적으로 ‘뒤엎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자기들의 생각, 또 그러한 뒤엎는 일과 혁명에 성공하면 자기들 세상이 되지만 실패하면 자기들이 탄압받게 될 것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좌익들 사이에 강한 연대의식을 형성해 주고 있다.
이 같은 좌익들의 연대의식은 다른 직능, 다른 직장, 다른 분야, 다른 지역에 종사하는 좌익끼리의 보조일치와 상호 지원을 가능케 하며, 필요할 경우 연합투쟁을 전개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이 같은 연대의식으로 인해, 좌익은 그들의 역량을 필요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으며, 그러한 역량 집중을 통해 자기들이 희망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좌익 또는 좌익 동조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한다.
신문사를 예로 들면, 편집국 기자와 공무국 노동자는 직능과 이해관계가 상이하다. 그러나 편집국 내의 좌익 기자와 공무국 내의 좌익 노동자는 혁명이라는, 또는 ‘뒤집어엎기’라는 공동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긴밀히 협력하게 된다.
편집국의 좌익 기자들은 공무국의 좌익 노동자들의 물리적 지원을 얻어 편집국의 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무국의 좌익 노동자들은 편집국의 좌익 기자들의 지원을 얻어 공무국의 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한다(이 말은 이 나라 언론계가 좌익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니, 독자는 오해 없기 바란다). 이 같은 좌익들의 연대투쟁은 비유하자면 재벌기업들의 상호출자와 같은 것으로서 좌익들은 이 같은 상호출자식 연대투쟁으로 각 직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한다.
▲ 양동안 교수는 지금부터 28년 전에 좌익세력이 주도하는 연합세력 정권을 거쳐 좌익이 집권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실제로 DJP 연합의 집권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하게 좌경화 되어 운동권 세력이 주축인 노무현 정부가 탄생했다.
좌익과 맞서 싸우면 백전백패
좌익세력의 연대의식에 입각한 협력과 투쟁은 각 분야, 각 지역단위로도 전개된다. 학계를 예로 들면, 가령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에서 교수를 신규 채용한다면, 좌익세력은 해당 학계 내의 모든 좌익 교수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그리고 좌익 대학생들의 역량까지도 동원하여 좌익 또는 좌익 동조적 인사를 그 자리에 집어넣는다.
물론 이러한 좌익의 인사 작전에는 때로는 우익인사나 정부의 고위관료들이 그러한 좌익들의 노력의 실상을 알지 못한 채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협조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만일 우익인사가 그들에 맞선다면, 이 나라에는 아직도 우익 인구가 다수이고, 이 사회는 아직 우익이 지배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백전백패(百戰百敗)한다.
또한, 각 대학 및 연구기관의 좌익 교수들은 전체 학계의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개별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문제에 대해서도 연대투쟁을 전개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좌익 교수가 불이익을 당하게 되면 학계의 모든 좌익 교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그를 옹호·지원한다.
심지어 학계에서의 상황이 이러한 지경이니, 다른 분야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ㄱ공장의 좌익 노동자들이 투쟁을 전개하면 ㄴ공장의 좌익 노동자들이 ㄱ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지원공작을 전개하고, A신문의 좌익 기자·노동자들이 투쟁을 전개하면 B신문의 좌익 기자·노동자들이 지원공작을 전개해 주는 것은 이제 항다반사가 되었다.
좌익세력은 직장이나 부문 내에서만 연대협력하고 연대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문별 경계를 뛰어넘어 유기적으로 연대협력하고 투쟁한다. 예를 들면, 좌익 연극인이 연극을 공연하면, 언론사 문화부의 좌익 또는 좌익 동조기자들은 그 연극을 선전하는 기사를 써 주고, 좌익 대학생과 좌익 노동자들은 관객을 동원하여 협력하며, 좌익 연극은 연극 속에 좌익 사상을 내포시켜 관객을 의식화한다.
또 좌익 기자가 월간잡지의 기자로 들어가면 좌익 내지 좌익 동조 필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원고청탁을 하고, 좌익 대학생들은 그 잡지를 구독하고, 일간지의 좌익 기자들은 좌익계 필자들의 글을 좋다고 평가한다.
또 신문사에서 노조가 쟁의를 전개하면 좌익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몰려와 진치고 꽹과리 치며 그들을 지원하며, 좌익 노동자의 투쟁 현상에 좌익 교수가 지원 나가고 좌익 기자가 취재를 하여 좌익에 유리하게만 보도한다.
좌익은 국내에서만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긴밀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좌익 활동을 외국에 미화하여 소개하고, 투쟁적인 좌익인사들에 각종 상을 수여하고 성금을 보내주며, 투옥된 좌익인사를 ‘양심수’로 미화하여 그들에 대한 국제적 석방운동을 전개하는 일은 모두 좌익세력의 직·간접적인 국제적 연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들인 것이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가 좌익의 득세 도와
이 나라에서 좌익의 세력 확대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자신들의 역량에 의한 것이지만, 좌익이 아닌 다른 세력에 의해서도 힘입은 바 적지 않다.
비(非)좌익 세력으로서 좌익의 확산에 기여한 대표적인 세력은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이다. 이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학계·언론계·정계·법조계·종교계 등에서 활동하면서 좌익에 대한 사회와 정부의 관용을 유도해 왔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사회와 사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대신에 그들은 발달된 감각을 갖고 있어 대중의 유행적 기호에 잘 영합하며 구미 리버럴리스트들의 생각과 행동을 무조건 흉내 내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무지를 쉽게 감추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는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문제가 무엇이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긴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다르며, 다른 나라의 사상정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 게다가 이들은 좌익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탓으로 해서, 그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교양서적 수준의 천박한 지식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상문제에 대해 구미의 리버럴리스트가 취한 태도를 이 나라에서도 그대로 답습한다. 뿐만 아니라 좌익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적어도 겉으로라도 좌익에 대한 동정적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이 나라의 경제문제는 무조건 민간 주도의 자유경쟁원리 도입만으로, 이 나라의 정치문제는 무조건 다수결적 민주주의 원리의 적용만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그들은 또 반공이란 냉전시대의 유물이므로 그것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 나라의 경제문제는 민간주도의 자유경쟁원리의 적용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이 나라 정치의 많은 문제는 대중의 기호에 따른 다수결 원칙 만에 의해 올바로 해결될 수 없다. 또 비록 구미에서는 냉전이 끝났을지 모르나 한반도에서는 이제부터 냉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익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의 주장은 정확히 따져보면 모두가 잘못된 것들이지만, 그들의 대중에 영합하는 기술 때문에 그들의 오류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천박한 지식에 근거한 이 나라 현실에 대한 비판은 좌익을 고무하고 좌익 동조 세력을 양산하게 한다. 또 그들의 반공에 대한 비판의 좌익의 활동에 중요한 지원이 된다.
게다가 그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언론계·정계·법조계 등에서 좌익에 대한 관용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여 좌익의 세력 확대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그들은 좌익을 ‘순수한 세력’ ‘이상주의 세력’으로, 그리고 좌익의 반(反)국가 범법행위를 순수의 발로라고 호도해 주고, 민주화만 이루어지면 좌익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엉터리 주장으로 정부와 대중을 오도(誤導)한다. 그들은 좌익에 대한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는 사람들을 ‘강경파’ 또는 ‘매카시스트’로 매도하여 무력화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좌익으로 하여금 보다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게 해 주고, 보다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해 준다.
좌익이 이같이 세력을 확대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각 분야에서 단계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해 가고 있는데도 그에 대한 우익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각 직장, 각 분야에서 우익인사들이 공격당하고 수모를 겪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적절한 보호조치조차 취해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대학 교수는 TV에서 이 나라 좌익을 비판하는 반공적 연설을 한 탓으로 좌익 학생들에 의해 자기 대학 교정에서 조리돌림 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조리돌림을 당하는 그 교수를 구해준 우익인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나, 당국이 그의 보호를 위해 어떤 대책을 취했다거나, 수모를 가한 좌익들에 대한 보복이 취해졌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지금 이 나라 대학가에서 좌익 학생들을 비판하는 학생들은 캠퍼스나 하숙방·자취방 등에서 좌익 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있다. 또 이 나라의 노동자 사회에서는 우익적 노동운동가들은 모조리 ‘어용(御用)’으로 몰려 매도당하고 노동조합장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우익인사들의 피해와 수모에 대한 분노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설마 어떻게 되겠어? 라고 현실 도피
이 나라의 우익인사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좌익 도전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우익인사들의 일부는 좌익 도전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알더라도 ‘설마 어떻게 되겠어’라며 고의적으로 현실 도피적 태도를 취해버린다. 극소수의 우익인사들은 좌익 도전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개탄만 하고 있다.
좌익의 도전은 날로 거세어져 심각한데, 그에 대항하는 우익의 목소리는 모기소리처럼 가냘프고 힘이 없다. 마치 이 나라 우익이 모두 죽어버린 것처럼, 좌익의 도전이 이토록 심각한데도 우익의 진정한 분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나라의 우익은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나라의 우익들은 거센 좌익의 도전 앞에 양순하게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좌익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일까지 하고 있다. 좌익은 우익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집단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이용하는데, 우익인사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들을 돕는다.
좌익은 우익의 어떤 인사를 집단적으로 이용하려 하면 그를 공개적으로 칭찬해 준 다음 그로 하여금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들 편을 들어 주도록 한다. 또 관계(官界)나 정계(政界)나 재계(財界)나 언론계나 학계의 영향력 있는 지위에 있는 우익의 사람들은 좌익인사가 친구나 동창, 친·인척, 그리고 동향인이라는 것을 빌미로 접근하여 도움을 요청하면, 그 좌익인사도 개별적으로 쉽게 도와준다.
그러한 영향력 있는 우익인사의 좌익인사에 대한 도움이 다른 영향력 없는 우익인사에 치명상을 입히는 경우라도, 그런 결과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도움을 제공한다. 좌익은 철저히 사상에 입각하여 움직이는데, 우익은 너무도 사상적 차원을 무시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각계의 영향력 있는 우익인사들의 행태 역시 ‘우익의 죽음’을 입증하거나 예고하는 하나의 지표인 것처럼 생각된다.
이 나라 우익은 목소리가 낮을 뿐만 아니라 좌익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준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우익세력은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다. 우익은 조직력이 없는 것이다. 또 우익인사들 간에는 좌익인사들 간에 나타나는 연대의식이 없으니, 비록 숫자가 많다 하여도 우익이 좌익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다. 모래가 1t이면 무엇하겠는가? 1㎏의 단단한 돌멩이를 당할 수 없는데.
이 나라 우익이 조직력이 없는 것은 우익세력의 본질 때문이기도 하다. 우익은 본시 공격적 입장에 있지 않고 방어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열성이 없고 조직력이 없다. 이 나라 정치에서 여당만 해온 정치인은 조직력이 없고, 야당을 오래한 정치인은 조직력이 강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이 나라 우익이 조직력이 없는 보다 큰 이유는 이 나라 사상 상황의 특수성에 있다.
우익세력의 지리멸렬
이 나라에서는 6·25 이후 전 국민이 반공우익으로 되었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간주되었다. 따라서 우익의 특별한 조직이 필요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익의 조직은 정부가 독점했다. 역대 정권은 우익세력 또는 반공세력을 사상전선이 아닌 정치 전선에 이용하기 위해 독점적으로 조직 관리했다.
이처럼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장기간 무조직 상태에 순치되었고, 관(官) 독점적 조직관리 하에서 민간의 자율적 조직 활동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 나라 우익은 조직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나라 우익이 연대의식이 없는 것은 이 나라의 전 국민이 우익이라는 고정관념과 이 나라 우익인사들의 유별난 정실주의(情實主義)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다 우익이라면, 특별히 우익인사끼리 연대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우익이라면, 적어도 이 나라에서만은 우익은 우익끼리 경쟁해야 하므로, 경쟁 상대인 우익에게 반감을 가질 망정 연대의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이 나라 우익인사들은 이 나라의 전통적인 정실주의로 사회화되어 있어서 사상적 경계선에 따른 우익인사 간의 연대 같은 것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사상전선에서의 동지보다는 사적(私的)인 연줄을 중시하는 것이 이 나라 우익의 전통적인 정실주의 관행이다.
이러한 관행은 좌익의 도전이 심각해진 지금에 와서도 변하지 않고 있다. 좌익 도전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주로 이러한 체질화된 정실주의 때문에 우익세력 사이에는 공고한 연대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우익인사가 자기와 연줄이 닿지 않는 다른 우익인사보다는, 연줄이 닿는 좌익인사를 도와줌으로써 그 좌익인사와 싸우고 있는 다른 우익인사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상황에서 우익세력 간의 연대의식이란 생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이제 좌익의 도전은 심각해지고 위협적으로 되었지만 우익은 그에 대응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익은 분열된 채 우익 내의 어느 집단이 좌익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려 하면 다른 분파에서는 그것을 비웃거나 비판하여 그런 움직임을 내부로부터 무력화한다.
그래서 독하게 덤벼들고 있는 소수의 좌익 앞에 압도적인 다수의 거대한 우익은 조직력의 연대의식도 없이 내부분열작용만 하면서 무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어서면 제까짓 좌익은 금방 박살낼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헛소리만 하면서.
이 나라 우익세력이 숫자는 많으면서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많은 우익인사들이 좌익의 공격을 받고 수모를 당하고 있으며, 우익의 나라에서 우익이 ‘핍박’ 받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 데는 위에 말한 것 이외에 다음과 같은 까닭들이 있다.
우익들은 ‘흙 묻히는 일’을 하지 않는다
첫째로, 우익인사들은 사상전을 남이 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좌익과의 대결에서 약하다. 이 나라 우익인사들의 대부분은 사상전은 사상전 전담인사들, 또는 직업적인 ‘꾼’들이나 하는 것이지 자기들은 그런 ‘흙 묻히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익인사들은 남이 싸워준 사상전에서 우익 승리의 혜택만을 향유하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지위가 높은 우익인사들일수록 그러하다. 그들은 좌익과의 사상전은 자기들이 직접 할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좌익들로부터도 ‘칭송’을 받고 싶어서 점잖고 우아한 미소로서 좌익을 대하고자 한다. 우익인사들의 경향이 이러하니 좌익의 도전 앞에 우익이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둘째로, 이 나라의 우익인사들의 상당수는 동포와 체제에 대한 애착심이 희박하며, 그러기 때문에 우익은 좌익의 도전 앞에 무력하다. 우리나라의 우익인사들, 특히 소위 ‘지도층’으로 불리는 우익인사들은 ‘피난민 의식’을 갖고 있다.
난리가 나면 그 난리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곳으로 피난가려는 의식, 즉 ‘피난민 의식’은 이 나라의 역사 때문에 형성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동포와 체제에 대한 애착심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포를 사랑하고 체제를 귀중히 여긴다면, 난리가 일어나면 피난 갈 궁리를 그토록 치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 지도층 우익인사들은 그러한 애착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외국에 피난 가서 살 재산을 미리 빼돌려 놓고, 자녀들을 미리 외국에 보내서 살리고 있는 것이다. 또 그들은 동포와 체제에 대한 애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동포가 경제성장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도 그것을 방치하고, 비윤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세력에 의해 자유민주체제가 박살나도 그러한 부패·독재세력에 빌붙어 꿀 빨아먹기만 했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우익인사들, 특히 지도층 우익인사들이 동포와 체제에 대한 애착심을 갖지 않고 피난민 의식만을 갖고 있으니, 좌익의 도전 앞에 우익이 강할 수 없다. 이 나라 땅, 그리고 자유민주 체제 하에서가 아니면 살지 않겠다는 확고한 각오가 없는 한, 우익은 좌익의 공격 앞에 제대로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도덕적 우월성이 없는 우익
셋째로, 이 나라 우익인사들의 많은 수가 좌익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익은 좌익의 도전 앞에 강하지 못하다. 이 나라의 정치사는 복잡했고, 이 나라의 역대 정권은 도덕성을 결여해 왔다. 또한 이 나라 경제는 사회정의나 경제윤리를 너무도 외면해 왔다. 복잡한 정치사 속에서, 그리고 도덕성이 결여된 정치권력 밑에서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지위와 부(富)를 달성하려면 누구라도 도덕적으로 완전히 결백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지위와 부를 누리고 있는 대다수의 우익인사들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러한 우익인사들은 순수성 콤플렉스에 걸려 있어, 순수한 자이면 좌익이건 반국가 행위자이건 간에 그들 앞에서 오금 저려 한다. 우익임을 자칭하는 이 나라 지도층 인사들이 이처럼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하고 순수성 콤플렉스에 걸려 있으니 좌익이 순수성을 표면에 내걸고 도전해 오는 앞에서 우익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로, 이 나라의 우익세력은 이론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젊은 세대 속에서 우익세력을 양성하는 노력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좌익들 앞에서 무력하다.
이 나라의 좌익세력은 주로 40대 이하의 젊은 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좌익 이론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수립해 놓고 있다. 또한 그들은 1970년대 이후부터 이 나라의 대학가와 노동자 사회를 중심으로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열기를 가지고 좌익세력을 양성·훈련하고 조직해 왔다.
그에 반해 우익 기성세대는 무엇을 해왔던가? 기성세대의 우익 세력은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책에 관한 이론적 학습을 해오지 않았다. 기성세대의 우익들은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해 보려는 ‘문제 의식’ 자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자기들이 좌익과 사상전을 전개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좌익과 대결하기 위한 이론학습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론 무장을 철저히 한 젊은 세대의 좌익의 도전 앞에서 무력하게 된 것이다.
‘젊은 세대 양성’에 대한 관심조차 없어
또한 기성세대의 우익은 젊은 세대에서 우익세력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지 않았다. 노력을 전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기성세대의 우익은 젊은 세대의 사상교육을 학교에만 맡겨버렸고, 학교에서의 반공교육을 비효과적이고 오류투성이고 생활화되지 않은 것들이어서 학생들이 대학쯤에 와서는 ‘반(反)반공’에 저절로 물들게끔 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젊은 세대 사이에는 ‘반(反)반공’이 당연시되는 좌익적 사고 경향이 지배적이고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니 우익은 젊은 세대에 있어서는 극히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젊은 세대로 구성된 순수하고 열정적인 행동대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섯째로, 지난날 반공·우익세력이 독재정권에 이용당해온 점 때문에 이 나라 우익은 무력해졌다. 지난날 이 나라의 독재정권은 관(官) 주도의 반공조직을 독재정권의 정당화에 이용해 왔다. 그 결과, 반공조직은 독재정권의 하수인 집단처럼 되어 버렸다. 결국 대중에 의해 우익은(반공조직에 참여했건 안했건 간에) 도매금으로 독재정권의 하수인 세력으로 간주되고 있고, 따라서 일반 대중들에 대한 우익의 호소력은 극히 미약하게 되었다.
민주화가 되면 마치 반공도 포기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풍토는 바로 그러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결과 좌익이 민주화를 외치면서 ‘반(反)반공’과 반(反)우익을 주장하면 우익은 그만 기죽고 마는 것이다.
여섯째로, 이 나라의 우익은 너무도 심각하게 분열되었기 때문에 좌익 공세 앞에 허약하다. 이 나라 우익은 여·야로 그리고 지역감정으로 좌익과 너무 심각하게 갈라져 있어 좌익 도전 앞에 단합된 대응을 할 수 없다.
여당은 권력을 독점하면서 같은 우익의 야(野)를 포용치 못한다. 여(與)는 차라리 좌익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망정 우익의 야에 대해서 권력의 몫을 나눌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당은 좌익이 야당을 비판할 때 좌익에 박수를 보낼 작정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또 야당은 여당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좌익과 협력하고, 좌익의 협력을 얻기 위해 좌익을 보호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좌익 도전 앞에 우익이 단합된 효과적 대응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우익의 어느 한쪽이 좌익과 대결하면 우익의 다른 한쪽은 좌익과 제휴하여 같은 우익을 견제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민주화의 혼란스런 진행 속에 좌익세력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고 좌익의 도전은 날로 거세어지고 있는데, 그에 대응해야 할 우익은 널브러져 무력하게 흐느적거리는 현재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좌익이 정권 장악할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상황에 계속될 경우 이 나라에는 처음에는 좌익세력과 제휴한 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그 다음 단계에는 좌익세력이 주도하는 연합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공산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젊은 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좌익의 세력은 확대되고, 그들의 도전은 강해지는데, 우익은 무력하고 젊은 세대에서는 우익이 더욱 무력하다면 시간이 가서 기성세대가 은퇴하고 오늘의 젊은 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도세대가 된다면 그러한 각 단계의 좌익 정권 등장을 무엇으로 막겠는가?
이 나라의 기성세대 우익인사들은 좌익세력의 정체와 세력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다. 기성세대의 우익인사들은 좌익세력의 위장전술과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의 오도로 인해 좌익세력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특히 순수한 젊은이들이나 과격한 이상주의자들 쯤으로 오해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젊으면 순수하고, 순수한 사람이면 잘못도 너그럽게 봐줘야 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다. 바로 이러한 고정관념 때문에 이 나라의 우익은 좌익의 정체를 잘못 알고 그들에 잘못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인 레닌·트로츠키·스탈린은 10대 말부터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전개해온 사람들이다. 중국대륙을 공산화한 모택동(毛澤東)·주은래(周恩來)·유소기(劉少奇)·등소평(鄧小平) 등 모두 10대 말이나 20대 초부터 공산주의혁명운동을 전개해온 사람들이다.
또 캄보디아를 공산화한 크메르 루주는 20~30대를 지도그룹으로 하고 불과 12~13세의 나이 어린 소년소녀들로 그들에게 추종하는 ‘어린애들의 집단’을 만들었다. 젊거나 나이 어리거나 간에 공산주의자는 어김없는 공산주의자요, 젊은 좌익분자는 나이든 좌익분자와 다름없는 좌익분자인 것이다.
젊으니까 순수하고, 순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이유로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된 이 나라 좌익을 가볍게 알고 관대하게 대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머지않아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를 공산화했듯이 이 나라에서도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좌익은 기성세대 중심의 우익을 제압하고 좌익정권을 수립하게 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기성세대 중심의 우익세력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크메르 루주가 나이든 사람들이었고 순수하지 않은 연령층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성세대의 우익이 그들의 정체를 잘못 알고 자신들의 무력한 자세를 수습하지 못하고 잘못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캄보디아의 기성세대 우익들은 크메르 루주의 10대 소년병들의 총칼에 쓰러지면서야, 공산주의자는 젊다는 이유로, 순수하다는 이유로 관대하게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젊은 좌익’ ‘순수한 좌익’이 오히려 더 무서운 존재들이라는 것을 이 나라의 우익세력은 올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좌익세력은 소수가 아니다
기성세대 우익이 이 나라 좌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또 하나의 것은 그들의 세력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이 나라에서 좌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게다가 그 숫자는 좌익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쉽다.
그러나 개괄적으로 말하여 그 혁명의 명칭을 뭐라고 부르건 간에 좌익 혁명운동을 주도하고 그에 참여하고 그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의 숫자는 매우 많을 것이다. 우리는 인천사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숫자나 1987년에 있었던 소위 좌경세력 주도의 각종 군중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고, 그들의 10분의 1만을 좌익으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이 나라 좌익세력의 규모는 일반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클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엄청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나라의 좌익들은 공식적으로는 스스로를 좌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 이 나라의 기성세대 우익들은 좌익세력의 규모가 작을 것을 희망하는 나머지 좌익세력의 규모를 축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좌익세력의 규모는 정부의 공권력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한 이 나라 좌익의 혁명 신념이 매우 확고하고 그 규모가 공권력에 의해 통제 가능한 수준을 초월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될 경우 이 나라에 좌익정권이 들어설 우려가 있다는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이미 이 나라는 좌익에 의해 크게 영향 받고 있다. 정부는 야당들의 영향을 받고 있고, 야당들은 재야의 영향을 받고 있고, 재야는 좌익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 대해 우익들은 올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좌익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 그것이 10년 후가 될 것인지, 한 세대 후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그런 사태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한 비극을 막으려면 이 나라의 우익이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나아가서 우익이 좌익을 제압하고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기성세대 우익들은 이러한 작업을 정부나 군부(軍部)에 기대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좌익이 더 설치면 정부가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래도 안 되면 군부가 나서서 좌익을 쓸어버리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좌익’을 ‘좌익’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정부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정부나 군부에 그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을 용납해 주고 있지 못하다. 현 정부(노태우 정부)는 취약한 지지 기반 때문에 자신의 정권 유지에 급급하고 있어 그 같은 좌익 숙청 작업을 전개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정권을 유지하려면 변덕스런 대중의 기분을 맞춰야 하는 바, 대중은 대체로 정부가 강경조치를 취하는 것을 무조건 싫어한다. 또한 야당들은 혹시나 강경세력이 등장할까봐 현 정부를 적당히 도와주면서, 강경조치를 취하지 못하도록 설득할 것이다.
그런 탓으로 인해, 현재 정부는 좌익을 ‘좌익’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약화된 의미인 ‘좌경세력’으로 부르거나 심지어는 ‘진보세력’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 대해 첫째도 관용, 둘째도 관용, 셋째도 관용의 관용일변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좌익을 그 본래 이름대로 ‘좌익’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이러한 현 정부가 좌익세력을 척결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명백한 무리이다. 현 정부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민주주의를 하면서 정부의 힘만으로 좌익을 척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부가 좌익을 척결해 주리라는 기대도 무리이다. 이 나라 군부는 지난날의 잘못된 정치 개입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불신당하고 있다. 군의 정치 개입 역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이토록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군부가 나선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좌익 척결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쉽게 얻을 것인지 의문스럽다.
또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급속도로 전개되고 있는 좌익 지휘하의 노동자 조직화는 군부의 그러한 노력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군부의 정치 개입은 반(反)군부 노동자가 조직화되지 않았을 경우에만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게 될 경우 좌익이 겉으로 ‘민주 수호’를 외치면서 학생·노동자·야당의 연합전선을 조직하고 사제(私製)무기로 무장하여 대항한다면 사태가 어떻게 결말 날 것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군부가 좌익을 척결해 주겠지 라는 안이한 기대는 무리인 것이다.
신(新)우익 세력이 궐기해야
그러면 누가 좌익을 제압하고 제거하는 작업을 전개할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민간 우익세력뿐이다. 민간 우익세력이 조직화하고 연대를 강화하여 좌익의 도전에 대응하는 작업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면서 필요하다면 정부와 비민간분야의 우익의 협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 나라 민간 우익세력은 좌익의 도전에 대항하여 일어서야 한다. 이러한 우익의 궐기는 빠를수록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조금만 늦어도 우익의 희생이 커질 단계에 이르렀다. 우익세력은 자신의 보호를 위해, 그리고 오늘의 젊은 세대와 후손들이 공산체제 하에서 고통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금 일어서야 한다.
사회 각 분야의 우익은 총궐기하여, 이론가는 이론으로, 조직가는 조직으로, 재력가는 재력으로, 완력가는 완력으로 좌익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나라의 우익은 분명 좌익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힘을 제때에 사용하지 못하면 마치 캄보디아에서 그러했듯이 우익은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좌익에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힘이 훨씬 더 강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제때에 동원·행사하지 못하여 불과 10대의 나이 어린 붉은 소년들에 어이없게 나라를 빼앗기고 그들에게 온갖 수모와 짓밟힘을 당하다가 끝내는 눈물도 제대로 흘려보지 못한 채 백골이 되고만 캄보디아 우익세력의 허망한 꼴을 이 나라 이 나라 우익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우익의 궐기를 누가 주도할 것인가? 이미 앞에서도 시사했었지만 이러한 우익의 궐기는 정부도 군부도 주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민간 우익세력만이 주도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번의 우익 궐기가 좌익의 제압·제거라는 목표 달성에 효과적이려면 민간 우익세력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춘 세력이 주도를 해야 한다.
첫째로 일반 국민 대중에 대해 강한 사상적 및 윤리적 설득력을 갖춘 세력이어야 한다. 이제부터의 좌익과 싸움은 사상의 싸움이며 대중을 누가 더 강하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의 싸움이다. 따라서 우익의 궐기를 주도할 세력은 우익 중에서도 이론 무장이 잘 되어 있어서 대중에 반좌(反左) 궐기의 필요성을 쉽게 인식시킬 수 있고, 대중 앞에서 전개되는 좌익과의 이론 투쟁에서 좌익을 압도할 수 있는 세력이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공·사생활에 있어서 윤리적인 흠결이 없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지난날 독재에 기생했고 부패에 동참했으며, 오늘날에도 대중의 빈곤과 소외의 아픔을 외면하고 저만 잘 살려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이론 무장이 잘 되어 있더라도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우익 궐기의 전면에 나서면, ‘저 사람들이 또’라는 회의감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둘째로 우리 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교정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의지가 확고한 세력이어야 한다. 좌익의 도전에 대응하는 우익의 궐기는 우리 사회의 기존구조와 각종 기득권·기득이익을 보호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우익의 궐기는 일차적으로 좌익의 제압·제거에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향후 내부로부터의 좌익의 위협을 받지 않을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 면에서 보면 혁명적 좌익분자들을 생산해 내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사회 각 분야에 모순과 비리가 많아 그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분노가 젊은이들을 좌익혁명가의 길로 안내하고 있으며, 그런 것들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좌익들의 ‘뒤집어엎자’는 주장에 박수를 보내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좌익과의 싸움에 나선다면 우익의 승리가 보장될 수 없다. 따라서 좌익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한 우익의 궐기를 주도할 세력은 개혁의지가 확고하며, 개혁의 프로그램을 선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론’으로 무장해야 싸움에서 이긴다
셋째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좌익의 조건을 물리치기 위한 우익 궐기의 목적은 이 나라의 요지부동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실천하는 데 있다. 때문에 우익 궐기를 주도할 세력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비록 그 방해 세력이 같은 우익진영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그에 단호히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 세력이어야 한다.
또한 지난날 이 나라의 우익 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는 독재정권을 도와주었다는 좋지 않은 기억이 이 나라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우익 운동과 관련된 이러한 국민의 좋지 않은 기억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우익의 궐기는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때문에 우익의 궐기를 주도할 세력은 국민의 뇌리에 있는 그러한 좋지 않은 기억을 씻어줄 수 있도록 경력과 행동방식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실천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우익 내에서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세력을 우리는 ‘신(新)우익’ 또는 ‘개혁적 우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난날 이 나라의 우익주도자들 중에는 이론 무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고 경력과 생활면에서 윤리적 흠결이 많으며 개혁의지가 희박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그들 중에는 자유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독재에 협력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구(舊)우익’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들 ‘구(舊)우익’이 우익 궐기를 주도하면 그 결과가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좌익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한 우익의 궐기에는 신우익과 구우익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여권 우익과 야권 우익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 나라의 모든 우익세력이 단합하여 궐기해야 한다. 다만 그러한 우익의 궐기가 좌익을 제압·제거하는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신우익·개혁적 우익이 우익 궐기의 전면에 나서서 그것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기):오늘날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좌익의 우익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글은 필자로 하여금 좌익으로부터의 여러 가지 핍박을 받게 할 것이다. 우선 좌익과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필자를 매카시스트라고 매도할 것이다. 필자는 결코 매카시스트가 아니며 매카시스트를 혐오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필자를 그렇게 매도함으로써 지식인 사회에서 필자가 고립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극렬한 좌익들은 필자에게 심리적 및 신체적 피해를 주기 위한 각종 조치들을 취할 것이다. 이러한 좌익으로부터의 핍박에서 필자를 구해 줄 제도나 세력은 이 나라에는 아직 없다. 정부는 지금 그런 일을 해 줄 의욕도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익세력도 아직은 조직화되지 못하여 그러한 핍박을 막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모든 양심적인 애국적 지식인이 좌익으로부터의 핍박이 두려워 좌익의 도전을 경고하지 못하고 우익의 궐기를 촉구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장래가 너무 암담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 글을 썼다. 우익의 나라에서 우익의 궐기를 주장한 지식인이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역겹고 전율스러울 뿐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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