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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2)ㅡ험프리 보가트와 '몰타의 매'

Joyfule 2012. 2. 6. 07:03

1999년 미국영화협회(The American Film Institute)는 미국 영화사상 최고의 남녀배우를

각 25명씩 선정하여 발표한 바 있는데, 그 중 남배우 1위 험프리 보가트를 선정했다.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 1899~1957)는 어떤 면에서 죽은 뒤에 더 유명해진 배우다.

뉴욕 출신의 그는 일찌기 1920년대에 연극에 투신하여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섰으나

영화계에의 데뷰는 늦게 1936년 레슬리 하워드와 베티 데이비스가 공연한 '화석의 삼림'

(Petrified Forest)에 악역으로 등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영화 '화석의 삼림'의 한 장면

 

              

 

   험프리 보가트가 워너사(Warner Bros)에 들어갈 당시 워너에는 폴 무니, 에드워드 G 로빈슨,

   제임스 케그니, 죠지 래프트 등 쟁쟁한 성격파 배우들이 즐비했다. 

   그는 몇 작품에 조연급으로 출연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41년 죤 휴스톤 감독의

   '몰타의 매(Maltese Falcon)'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여 하드 보일드(hard-boiled)한 면모를

    유감없이 표출함으로써 단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John Huston 감독과 함께 이른바 hard-boiled 영화의 대표적인 아이콘이 된다.

    이렇게 죤 휴스톤에게 발탁된 것이 계기가 돼 그는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몰타의 매'는 그에게는 출세작이며 이는 오로지 죤 휴스톤(John Huston, 1906~1987)의

    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래 사진 죤 휴스톤)

                          

        험프리 보가트는 '몰타의 매' 이후에도 죤 휴스톤과의 인연은 오래 지속된다.

 

 

     그는 다음 해인 1942년에는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카사블랑카(Casablanca)'에서

    잉그리트 버그만, 폴 앙리드, 클로드 레인즈 등과 공연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아카데미 주연남우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아래 영화중 삽입곡 'As Time Goes By' 동영상을 감상하시기 바란다.          




 

 

 

     그는 2차 대전 중에는 몇 편의 전쟁영화에 출연했고 전후 1948년에 다시 죤 휴스톤과 합류하여 

    화제작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The Treasure of the Siera Madre)'에 출연하여 죤 휴스톤의

    아버지인 명배우 월터 휴스턴, 팀 홀트 등과 공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인다.

            

   

                     

   .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죤 휴스톤(아래 사진)은 아카데미 감독상과 각본상을 수상하고

            월터 휴스톤(위 사진)은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지만 험프리 보가트는 빠졌다.

 

                             

 

 

 

    그러나 1951년 역시 죤 휴스톤 감독, 캐서린 헵번과 공연한 '아프리카의 여왕(The African Queen)'

   에서 주정뱅이 목탁선 선장역을 맡아 드디어 아카데미 주연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상하게 된다.

 

                              

            

            

 

                  

 

 

           이후 그는 1954년 '야망의 항로(Beat the Devil)'ㅡ죤 휴스톤 감독으로

       제니퍼 죤스, 지나 롤로브리지다, 피터 로레, 로버트 몰리 등과 공연하였는데,

        이 영화가 죤 휴스톤 감독과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이후 그는 1953년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케인호의 반란(The Caine Mutiny)에서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선장역을 맡아 열연, 또 한번 아카데미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다음해 1954년 그는 죠셉 L 멘키위츠 감독의 '맨발의 백작부인(The Barefoot Contessa)'에

      출연, 에바 가드너와 공연한다.

                           

                   

 

   

    

                         

 

        이어서 같은 해 빌리 와일더 감독의 '사브리나(Sabrina)'에 출연, 오드리 헵번, 윌리암 홀덴과

      공연하여 그의 또 다른 일면을 나타낸다. 원래 이 역은 캐리 그란트에게 배정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케리 그란트측의 사정으로 보가트에게 온 것이지만 결과는 더 잘됐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다음 해 1955년 그는 윌리암 와일러 감독의 '필사의 도망자(The Desperate Hours)'에 출연하여

명우 프레드릭 마치와 치열한 연기 대결을 펼친다.

 

                   

 

    

 

          이 영화에서 그는 내면적인 연기로 극한 상황에 처한 탈옥수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여

        그의 만년의 완숙한 연기 면모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다음 해 1956년 그의 마지막 출연 영화는 마크 로브슨 감독의 'The Harder They Fall'이다.

 

    

 

          권투계의 비리를 고발하는 성격의 이 영화를 끝으로 그는 영화 출연을 마감했다.

       그는 약 30년에 걸친 영화 생활에서 총 7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험프리 보가트는 이듬해 1957년 1월 로스엔젤스에서 5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死因은 식도암으로 그는 평소 술과 담배를 지나칠 정도로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44년에 헤밍웨이의 단편 '가진 자와 못가진 자(To have and have not)'를 영화화한

      작품에 로렌 바콜(Lauren Bacall)과 공연한 것이 인연이 돼 다음 해 1945년에 결혼했다.

 

                        

 

                          이들은 보가트가 죽을 때까지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 1, 딸 1를 두었다.

 

                         

 

   험프리 보가트는 사후에도 생전에 못지 않게 전세계 영화인들의 관심과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기에 AFI에서는 그를 미국 영화사상 최고의 남자 배우로 선정한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들 세대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명배우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2012. 2.4.   鶴軒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