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은 오로지 자신이 창조한 완벽한 여자 조각상 갈라테이아하고만 사랑에 빠질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갈라테이아는 행복했을까? 자신을 창조한 피그말리온을 사랑했을까? 여기서 출발한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이다. 영화에서 음성학의 대가인 교수는 시골뜨기 처녀 일라이자를 세련된 요조숙녀로 변신시킨다. 그녀의 바뀐 모습은 창조자인 교수를 설레게 하지만, 일라이자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뿐이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마이 페어 레이디>
-버나드 쇼, 김소임 옮김, <피그말리온>, 열린책들, 2011, 36쪽.
언어습관 교정만으로 '숙녀'가 될 수 있을까?
버나드 쇼는 뛰어난 음성학자 헨리 히긴스를 통해 이 피그말리온 효과가 지닌 고유의 딜레마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헨리 히긴스는 자신의 전공인 음성학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어린아이보다 미숙하다. 그는 '내가 만든 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창조주의 우월감으로, 자신의 '작품', 일라이자를 바라본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피그말리온의 치명적인 콤플렉스를 숨기고 있다.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여성에게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이상 속의 여성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현실의 여성들은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을까?'하는 고민이 조각상 갈라테이아를 만들게 한다. 피그말리온은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바람직한 이상형으로 바꾸려는 열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주어진 현실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우울한 완벽주의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여자를 싫어하지만 '사랑' 자체는 싫어하지 않는다. 피그말리온은 뼛속 깊이 절절한 사랑을 간직한 로맨티스트였다. 그러나 버나드 쇼가 그린 현대의 피그말리온은 한층 더 심각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히긴스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관계 자체를 포기하는 소심함을, 타인에 대한 지배욕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일라이자는 모두가 깜빡 넘어갈 만한 요조숙녀가 되지만, 요조숙녀가 된 뒤 어쩐지 전에 없던 서글픈 표정을 짓곤 한다. 꽃 파는 소녀의 생기발랄한 매력은 사라지고, 우울한 몽유병자처럼, 아름답지만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그녀. 이제 원하는 것을 드디어 이루었는데, 그녀의 모습은 왜 그리 서글퍼 보일까.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기에 신비로워 보이지만, 자신의 진짜 페르소나를 숨겨야 하기에 그녀만의 그녀다움을 잃어버려 그토록 슬퍼 보이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의 말씨를 교정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커다란 이득을 취하는 사기꾼 네폼먹은 일라이자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어, 그녀는 틀림없이 '헝가리 왕족'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그녀는 대단한 사기꾼을 속여 넘긴 더 커다란 사기꾼이 된 것이다. 일라이자는 모두가 자신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며 히긴스에게 고충을 털어놓는다. "더는 못 견디겠어요. 사람들이 모두 나만 뚫어지게 쳐다봐요. 어떤 할머니는 내가 빅토리아 여왕이랑 똑같이 말을 한다고 그랬어요." 그녀는 한때 이들과 비슷해지고 싶었지만, 이제는 이 귀족들의 체면 놀이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도 이 사람들이랑 똑같아질 수는 없어요." 그녀는 그저 '숙녀 인증'만 받으면 내기에 이길 수 있었지만, 휘황찬란한 공주 대접을 받자 더더욱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우아한 여자가 되었지만 일라이자는 행복을 얻지는 못했다
"난 무엇에 어울리는 사람이죠? 나를 무엇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든 거예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해요? 난 뭘 해야 하죠? 나는 어떻게 될까요?" 히긴스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며, 이제 소원대로 꽃집 점원이 되든지 멋진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부추긴다. 일라이자는 분노에 차서 절규한다. "나는 꽃을 팔았지 나를 팔지는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숙녀로 만들어버려서 나는 이제 어떤 것을 팔아도 어울리지 않아요." 히긴스는 거리의 꽃 파는 처녀를 일약 사교계의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자신이며, 그녀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모두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그 애 머릿속에 넣어주지 않은 생각, 내가 그 애 입에 심어주지 않은 단어가 하나라도 있나 곧 보시게 될 거예요. 코번트 가든의 으깨진 배추잎을 가지고 제가 이 물건을 만들어냈다니까요. 그런데 이제 나한테 숙녀 행세를 하려고 하다니!"
일라이자는 자신을 진정한 숙녀로 만들어준 것은 히긴스의 '음성학 수업'이 아니라 피커링 대령의 '친절과 존중'이었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피커링 대령이 '둘리틀 양'이라고 불러주는 순간, 처음 보는 낯선 신사가 이름 모를 꽃 파는 처녀에게 정중하게 '둘리틀 양'이라고 불러주는 순간. 그 순간이 진정한 '자기 존중의 시작'이었다고. 피커링 대령 스스로도 너무 자연스러워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잘한 행동습관들, 즉 숙녀 앞에서 모자를 벗는 것, 여성이 먼저 지나가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 등등, 이 모든 행동들이 그녀를 진정한 숙녀로 만들었다고. 옷을 멋지게 입는다거나 상류층의 발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진정한 숙녀 대접을 해주는 순간, 진짜 숙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싹튼 것이다.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대접받느냐에 달렸죠."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중에서
난 약간의 친절을 원해요. 난 천하고 무식한 아이고, 당신은 유식한 신사인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 발톱의 때는 아니에요. 내가 그 일을 했던 건 옷을 얻거나 택시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가 같이 있으면 즐겁고, 내가 선생님을, 좋아해서, 좋아하게 돼서 했던 거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신분이 다르다는 걸 잊은 것도 아니에요. 단지 더 친해졌으면 했던 거예요.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중에서
원작 <피그말리온>에서는 일라이자가 젊은 남성 프레디와 결혼을 하지만, 영화에서는 히긴스와의 새로운 러브 스토리가 시작될 것 같은 희망적인 분위기로 끝을 맺는다. 버나드 쇼는 '일라이자가 히긴스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적어 대중의 '집단적 오독'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히긴스의 그 잘난 콧대를 꺾어 놓고 그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진짜 남자가 되기를 바라는 대중의 뜨거운 열망은 꺾어놓지 못했다.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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