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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15.

Joyfule 2009. 10. 31. 09:10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15.   
    눈 깜짝할 사이에 빵을 다 먹어치운 뒤 물병의 물도 한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몹시 허둥대며 허겁지겁 떠날 채비를 했다. 
    물병을 배낭 속에 집어 넣고, 배낭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짊어지고 
    지팡이와 모자를 쫙 움켜잡은 채 잰걸음으로 헐떡거리며 수풀 속으로 사라져 갔다. 
    뭔가를 스쳐 가는 소리, 나뭇가지를 헤쳐 나가는 소리, 
    그리고 지팡이가 딱딱한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박절기 같은 소리가
    큰길 쪽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며 이어졌다. (탁, 탁, 탁, 탁, 탁) 
    난 가문비나무의 줄기를 꽉 끌어안으며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내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되돌아갔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한이 났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싹 가셨다. 
    웃기는 짓거리 같았다. 
    난 내가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좀머 아저씨를 그 다음 번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로부터 5, 6년쯤이 지난 후였다. 
    그 사이에도 물론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그를 큰길이나, 호숫가의 수많은 오솔길이나, 
    텅 빈 들판이나, 숲에서 만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만남은 내게 별로 이상스럽게 생각되는 것이 아니었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 아저씨를 너무나 자주 보아 왔기 때문에 
    아저씨를 마치 눈에 익은 농기구를 보듯이 
    건성으로 보게 될 만큼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만남이었다. 
    그것은 마치 매번 놀란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큰소리로 외치지도 않으며 하는 이런 말들과 마찬가지였다. 
    "저것 봐, 교회 종이 있네! 저기 학교 앞산 좀봐! 저기 버스가 지나간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일요일에 경마장에 가다가 아저씨를 보면 
    나는 그냥 아버지와 농담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저기 좀머 아저씨 간다. 저러다가 죽겠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당장 눈으로 보고 있는 아저씨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 아니라 
    수년 전 우리 아버지가 이른바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말을 사용했었던, 
    우박이 쏟아졌던 그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 무렵 누군가의 입에서부터인가 
    인형을 만들던 아저씨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였는지는 아무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더 이상 페인트 칠장이 슈탕엘마이어 씨네 지하실에서 살지 않았고 
    - 거기에서는 이제 리타가 남편과 함께 살았다 - 
    그 집에 서 몇 채 뒤에 있는 리들 어부 아저씨네 집 다락방에서 살았다. 
    나중에 리들 아줌마에게서 들은 말에 의하면 
    아저씨는 집에 아주 잠깐만 들러서 뭘 좀 먹을 것을 만들거나 
    차를 끓여 마시고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나가고는 며칠씩 집에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잠을 자러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아저씨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에서 밤을 보냈는지, 
    어디에서 잠을 자며 시간을 보냈는지, 
    잠을 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밤낮으로 이곳 저곳을 헤매며 돌아다녔는지, 
    그런 모든 것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다른 걱정거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가용이나 세탁기, 잔디밭의 스프링쿨러에 대한 걱정은 했어도 
    어느 늙은 별종이 어디에서 잠자리를 폈는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들은 말이라든가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라든가 
    히르트 아줌마가 새로 문을 연 셀프서비스 가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좀머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좀머 아저씨는 가끔씩 사람들 눈에 띄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자면 세월 다 보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세월의 흐름에 맞춰 성장해 나갔다. 
    그 무렵 -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 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고, 
    어떤 때는 내가 세월을 앞질러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조차 했다! 
    키가 거의 1미터 70에 육박하고 있었고, 
    몸무게는 49킬로그램이었으며, 신발은 41을 신었다. 
    학교는 고등 학교 5학년에 올라갈 차례였다. 
    그림 형제 동화집도 다 읽었고, 모파상의 작품도 반은 읽었다. 
    담배도 조금 피울 줄 알았으며, 
    오스트리아의 여왕에 관한 영화도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도 들어갈 수 있고, 
    부모를 동행하지 않고 혹은 보호자와 함께 가지 않아도 
    밤 10시까지 유흥업소에 있어도 된다는 허가증인 (16세 이상)이라는 빨간 도장이 찍힌, 
    그렇게도 고대하던 학생증을 받을 날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다. 
    3차 방정식도 풀 수 있게 되었고, 라디오 수신기의 수정 검파기도 조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갈리아 전기 De bello Gallico)의 서두와 
    오디세이의 첫 줄을 달달 외워 말할 수도 있었다. 
    사실 마지막의 것은 내가 그리스어를 한 단어도 배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할 수 있었다.
    피아노는 디아벨리나 끔찍스럽던 헤슬러의 곡은 더 이상 치지 않았고, 
    블루스나 부기 - 우기 외에 하이든, 슈만, 베토벤, 
    혹은 쇼팽처럼 유명한 작곡가의 곡들을 쳤고, 
    미스 풍켈 선생님이 가끔씩 난리 법석을 떨어도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마음속으로 빙긋이 웃으며 
    그런 시간이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라는 여유까지 생기게 되었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내 소유로 자전거도 한 대 갖게 되었다. 
    그것은 원래 형의 것이었는데 손잡이가 경주용 자전거라서 
    밑으로 휘어지고 기어가 3단까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타고, 나는 우리 집에서부터 미스 풍켈 선생님네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최단 시간이었던 13분 30초를 12분 55초에 끊음으로써
     - 내 손목시계로 재어 본 결과 - 35초 이상이나 단축하였다. 
    나는 정말 - 최고로 겸손하게 말해 보더라도 - 
    속도와 지구력에서뿐만 아니라 기교 면에서도 눈부신 훌륭한 자전거 주자가 되었다. 
    손을 잡지 않고 타기, 손을 잡지 않고 커브 길을 돌기, 
    정지 상태에서 회전하기, 급브레이크로 방향 바꾸기 등을 할 수 있었고 
    회전으로 인해 생기는 효과들은 이젠 내게 아무런 문제도 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짐을 싣는 곳 위에 서서 달릴 수도 있었다. 
    사실 하나도 쓸모 없는 짓이기는 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신뢰를 갖게 한
    기계적인 회전 충격 보존력을 확실하게 인정하도록 만든 예술적인 행위였다. 
    자전거 타기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나는 그야말로 열광적인 자전거 주자였고, 
    내게 있어서 자전거 타기란 날아다니는 것과 거의 다름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