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3.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Joyfule 2009. 11. 7. 01:36
     3.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사랑하는 당신. 
    실로 오랜만에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어제는 당신이 다녀가셨지요. 그건 뜻밖이었어요.
     제가 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그 동안 당신께 이 곳 얘기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여기에 올 때 제 마음은 하루나 이틀만 묵고 갈 생각이어서 
    당신께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요. 
    제 심정을 당신께 알려 드리는 일이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요. 
    무슨 일을 글로 써 보는 것에 습관이 들여지지 않아서인지, 
    어제 당신의 혹독한 질책처럼 마음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제가 억지로 몰아붙이고 있어서......인지...... 펜을 놓고 다시 쓰질 못하고 있었어요. 
    어제 당신이 오시기 바로 전에 저는 우사(牛舍)에서 
    소 분만시키고 계시는 아버지 곁에서 그 뒷심부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제게 물었던 텃밭, 
    그 여자가 은은한 향내를 풍기며 나비보다 더 가볍게 
    연두색 배추를 뽑던 그 밭이 지금은 우사가 되었습니다. 
    다른 소들보다 수월하게 송아지를 낳았다고 아버지께선 어미 소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그것도 수송아지를요. 
    아버지께서 소 태(胎)를 거두시는 걸 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당신이 제 집 마당에 서 계시더군요. 
    처음엔 거기 서 계시는 당신이 환영인가...... 
    어떻게 당신이 여기를? 헛것이겠지...... 했어요.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당신을 쳐다보기만 했을까요? 
    당신을 알고 지내는 동안 늘 소망했었습니다. 
    당신을 아버지께 봬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간절하던 마음이 이루어졌는데, 저는 마치 도망자를 감추듯이 
    당신을 끌고 황급히 대문을 빠져나와야 했다니, 
    아버지와 당신의 그 짧은 만남이라니. 
    시내 다방에 마주앉았을 때, 당신은 나를 질책하였어요. 
    당신은 저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건만, 
    제가 당신과의 관계를 그저 남녀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렇지 않으면 왜 약속을 어기려 드느냐고 되물으셨지요. 
    저는 당신께 제 심정을, 복잡하게 들끓고 있는 이 심정을, 
    단 몇 가닥만이라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건드려 놓은 제 심정에 대해서 말이에요. 
    역시 당신은 무슨 소린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셨지요. 
    저는 제 심정을 글로 옮겨 놓는 재주만 없었던 게 아니라, 
    눈썹 하나만 까딱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던 당신, 
    다름 아닌 그 당신께 말로 옮기는 재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 여자가 만들어 줬던 음식에 대해서, 
    그리고 제가 근무하고 있었던 스포츠 센터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에어로빅 수강을 받던 중년 부인에 대해서 얘기하면 할수록 
    당신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셨어요. 
    그러다 곧 눈물에 젖는 당신의 눈을 바라봐야 하는 
    제 괴로움이 그토록 술을 마시게 했습니다. 
    오이채를 썰어 넣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소주를 저는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퍼마셨습니다. 
    제가 당신과의 관계를 남녀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생각하다니요? 
    어제 당신과 저는 꼭 한집에 살고 있는 개와 고양이 같았습니다. 
    둘이 앙앙대는 건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서라지요. 
    개가 앞발을 들면 함께 놀자는 마음 표시인데, 
    고양이에겐 그게 언제든지 대들겠다는 경계신호라잖아요. 
    고양이가 귀를 뒤로 젖히는 건 심정이 사나우니 
    건드리면 언제든 할퀴어 놓겠다는 뜻이지만, 
    개는 당신에게 순종하겠다는 의미라니, 둘 사이에 오해가 싹틀 수밖에요. 
    어제 당신과 제가 꼭 그랬습니다. 
    제 마음을 당신은 느닷없이 왜 그렇게 고고해졌느냐며 할퀴었고, 
    저는 당신 이외의 다른 감정을 모두 뭉개려만 드는 이기주의라고 당신을 물어뜯었습니다. 
    당신은 출국 날짜를 일러주고 가셨습니다. 
    그 날짜에 맞춰 제가 돌아올 걸 믿는다고도 하셨습니다. 
    당신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새벽 기차를 타고 다시 도시로 가셨어요.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진 마루에 앉아 계셨습니다. 
    당신의 팔을 붙들고 황급히 도망치듯 집을 나섰던 저를 보고
     짐작하신 게 있으신지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 계셨어요. 
    무슨 말씀이든 다 들으려고 아버지 곁에 엉덩일 붙이고 앉았으나, 
    얼마 후에야 아버진 그냥 방으로 들어가시며 힘없이 중얼거리시더군요. 
    그 놈, 수송아지가 눈뜬 봉사여야. 
    방금 어머니께선 상가(喪家)에 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점촌 할머니예요. 
    생전을 춥게만 살드만 가는 날은 따뜻헌 날 잡았구나. 
    어머니는 봄볕을 내다보시며 혀를 쯧쯧, 차셨습니다. 
    가신 분이 점촌댁, 점촌 할머니라고 들었을 때, 저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어요.
     기...... 억은, 이상한 것이에요. 
    칠흑 같은 무명에 휩싸여 있던 것들이 
    어떻게 해서 한 순간 그렇게도 투명하게 비춰지는지. 
    제 기억 속의 점촌댁은 울면서 줄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 분이 아직 살아 계신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점촌댁, 점촌 할머니댁은 이 마을 끝에 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자주 그 댁에 밤마실을 갔었어요. 
    그 때, 점촌댁은 다리를 절둑이며 줄넘기를 하고 계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