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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Joyfule 2009. 11. 9. 00:14
        4.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다리도 안 성한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여! 
    어머니께서 한사코 말렸지만 점촌댁은 줄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마을 아주머니 몇 사람이 모여 앉아 하는 얘기로는 
    점촌댁이 제사장을 봐 머리에 이고 오는 중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짐자전거를 피하려다 다리 밑으로 굴러 다리를 다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촌댁은 그로 인해 거의 이 년 동안을 운신을 못 하셨고, 
    그 사이 점촌 아저씨가 다른 여자를 봤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방안에만 있느라고 뚱뚱해진 점촌 아주머니는 
    그 이후로 그 아픈 다리로 서서 울면서 줄넘기를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끼줄 두 줄을 뚤뚤 엮어 만든 그 줄. 
    지금 당신이 있는 그 도시. 제가 강사로 나가던 
    그 스포츠 센터의 에어로빅 저녁반 시간에 어느 날 한 중년 부인이 새로 들어왔었죠. 
    아! 당신께 말씀드렸지요. 
    첫시간 수업 도중에 폭삭 무너지며 통곡을 했다는 그 중년 부인요.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고 악을 썼다는 얘긴 
    제가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었어요. 
    그 이후로도 그 여인은 에어로빅 도중에 자주 주저앉아 울었지요. 
    "어제는 그 젊은 애가 전화를 걸어왔지 뭐예요! 
    남편이 나와 이혼하고 저랑 살기로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라니까요, 선생님."
    점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 여인의 에어로빅이...... 할머니의 새끼줄 줄넘기와 함께,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간 건 또...... 웬...... 
    점촌댁, 이젠 돌아가신 점촌 할머니가 언제부터 줄넘기를 그만 두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점촌 댁은 지금껏 홀로 살다가 이제 할머니 되셔서 가신 거예요. 
    사랑하는 당신. 
    어제대로 라면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시겠지요? 
    그 여자들이 도대체 너와 무슨 관련이 있니? 하시면서. 
    아무리 신비스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 과거는 그 사람들 것이다. 
    하물며 그 닥 엿볼 과거도 아닌 것을 왜 들여다보느냐구요. 
    자기 자신이 캐 낸 인생만이 값어치가 있는 거야.
    무리 지어 살면서 생긴 것들을 남들은 헤치고 나오려고 하는데 넌 이상하구나, 
    젊은 애가 왜 꾸역꾸역 그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냐......고. 
    어제 차마 당신께 할 수 없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과 저를 한꺼번에 어디선가 끌어내려 구덩이에 처넣는 일만 같아, 
    어떻게 해서든 이 말만은 당신께 하지 않으려고 
    그 술집에서 당신께 발광을 부렸던 겁니다.
    당신을 발로 차고, 당신의 가슴에 주먹질을 하고, 
    당신을 짓이기면서 대들었던 건 
    막 새나 오려고 하는 이 말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랬던 겁니다. 
    창백하게 앉아만 있던 당신. 
    제가 이 말을 하고 나면 당신이 저를 질책하셨던 대로 
    당신과의 연을 남녀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수긍하는 셈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지금도......이 말을......당신께......꼭, 해야 하는가......? 
    몇 번이고 제 자신에게 되묻게 됩니다. 
    내뱉고 말면 어쩌면 당신은 저를 증오할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지요. 
    당신이나 나나 그 두 감정이 서로 동시에 마음을 언덕 삼아 맞대고 있지 않았나요?
    다만 그 동안 우리는 아주 위태롭게 사랑 쪽을 지켜 왔던 것 아닌 가요? 
    어쩌면 제 이 말이 증오 쪽으로 당신 마음을 돌려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저를 용서하세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제 말이 모두 당신에게 오리무중일 것만 같으니, 
    점촌 아주머니를 혼자 살게 한 점촌 아저씨의 그 여자, 
    그 중년 여인으로 하여금 울면서 에어로빅을 하게 만든 그 여자...... 
    언젠가, 우리 집...... 그래요, 우리 집이죠......
    거기로 들어와 한때를 살다 간 아버지의 그 여자...... 
    용서하십시오...... 제가...... 바로, 그 여자들 아닌 가요? 
    사랑하는 당신. 
    노여워만 마세요. 
    저는 그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타인에 대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자가 남겨 놓은 이미지는 제게 꿈을 주었습니다. 
    제가 더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담임 선생님은 
    개인 신상 카드를 나눠주며 기록을 해 오라 했습니다. 
    그 개인 신상 카드 어느 면에 장래 희망을 적어 넣는 칸이 있었지요.
    장래 희망. 저는 그 칸 앞에서 오빠 볼펜을 손에 쥐고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어요. 
    ......그 여자처럼 되고 싶다...... 
    이것이 제 희망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심어 놓고 간 일들을 구체적으로 간추려서 뭐라고 써야 하나? 
    이것이 고민스러워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던 것입니다. 
    끝끝내 그걸 간추릴 단어를 저는 그 때 알고 있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어느 때는 은행원, 
    어느 때는 학교 선생님, 
    어느 때는 발레리나라고 써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표현되는 그때 그때의 희망들은 모두 그 여자를 지칭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우리 집에 살기 시작한 지 열흘만에 큰오빠만 빼고 모두를 끌어안아 버렸어요. 
    백일이 갓 지난 울 줄밖에 모르던 그네 속의 막냇동생까지요. 
    그 여자의 손이 닿아 제일 먼저 화사해진 게 아기 그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