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반전의 역사를 이루라

Joyfule 2023. 3. 8. 01:33




        반전의 역사를 이루라 



< 내 뒤의 존재가 중요하다 >

 “내 등 뒤에 누가 있는가?”는 인생 성패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는가? 미국의 배경도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을 의지하면 안 된다는 기본 전제 하에서 한국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우리 민족은 비교적 온순하고 순종적이다. 그 장점이 잘못 이용되면 독재자가 나오기도 쉽다. 북한의 독재 권력이 오래 유지되는 것은 북한 사람의 민족성이 우리와 특별히 달라서가 아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사람도 독재 권력이 무섭게 겁박하면 북한 사람처럼 될 수도 있다.

 만약 독재자가 나타나 본보기로 제일 큰 언론사 하나를 샅샅이 뒤지고 언론사주 가족까지 샅샅이 털어 국민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환호하면 다른 언론사들은 겁이 나 침묵하면서 여론을 얼마든지 좋게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북한과는 달리 독재 권력이 오래 유지되기 힘든 한 가지 결정적인 상황이 있다. 그것은 남북 대치로 동맹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의 등 뒤에서 함께하는 동맹이 미국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독재를 하려고 해도 등 위에 있는 동맹인 미국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사실상 무조건 독재하기가 쉽지 않다.

 왜 북한의 독재가 오래 가능했는가? 북한 뒤에서 함께하는 나라도 독재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내 등 뒤에 어떤 사람과 어떤 동맹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미국과 동맹이니까 언론을 무조건 계속 침묵시킬 수 없기에 진실이 드러나면 언젠가 독재는 무너진다. 결국 미국이 우리 뒤의 동맹이란 사실은 큰 축복이다. 그것보다 더욱 큰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나의 등 뒤로 하나님을 던져버리지 말고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라. 그러면 평안도 따르고 번영도 따른다.

< 반전의 역사를 이루는 길 >

 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가? 하나님을 등 뒤로 던져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불행한 삶을 행복한 삶으로 회복시키고 반전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가?

1. 회개하고 기복주의를 버리라

 어느 날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었다(1절). 여로보암은 아들 아비야가 병들자 아내를 변장시켜 일찍이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예언했던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냈다(2절). 그가 자기 대신 아내를 일반인으로 변장시켜 보낸 것은 아히야가 권고한 말씀을 따르지 않아 그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여로보암은 자기 정체를 숨기지 말고 떳떳하게 자기 죄를 회개해야 했다. 그러나 회개도 없이 선지자의 예언만 받으려고 했다. 하나님은 그런 기복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큰 기도 제목이 생기면 용한 사람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라. 왜 하나님은 기복주의를 싫어하시는가? 기복주의는 우상숭배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은 다 우상숭배다. 하나님을 뜨겁게 믿었다가 급속히 냉랭해지는 냄비 신앙을 버리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하나님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돌솥 신앙을 가지라. 몇 번 기도하고 “왜 응답이 없지? 왜 반전의 역사가 이뤄지지 않지?”라고 생각조차 하지 말라. 기도할 때 기도 응답에 집착하지 말고 일단 기도로 하나님과 만난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하라.

 사람도 열 번 만나면 이웃이 되고 백 번 만나면 친구가 되고 천 번 만나면 부부가 된다. 비유적인 의미로 하나님과 계속 기도로 만나면 하나님의 친구처럼 친밀해지고 더 만나면 하나님의 아들처럼 권세가 나타나고 더 만나면 하나님의 신부처럼 온전히 하나가 된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관계가 충분히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서 복과 응답이 있기를 바라지 말라. 하나님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지렛대로 삼지 말라. 욕심과 기복주의를 버리고 평안 가운데 순수하게 하나님을 추구할 때 하나님이 내 마음의 소원을 아시고 가장 멋지게 일하실 것이다.

2.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라

 마침내 여로보암의 아내가 도착하자 아히야가 말했다.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 어찌 다른 사람인 체 하느냐?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전하겠다(6절).” 그리고 먼저 여로보암의 죄를 질책했다(7-9절). 특별히 본문 9절에 언급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라는 구절을 보면 결국 자기중심주의와 우상숭배는 한 통속이라는 뜻이다. 자기중심주의는 복 주시는 하나님보다 복을 더 바라보게 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다.

 늘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나만 옳다는 고집을 꺾고 세상을 정복하기 전에 나부터 잘 정복하게 하소서.” 남의 잘한 것을 인정해주고 심지어는 경쟁자를 통해 좋은 일이 이뤄지는 것도 기뻐할 줄 알라. 또한 밝은 얼굴로 밝은 대화를 하고 칭찬과 격려도 많이 해 주라. 그것은 위선이 아니다. 원수도 칭찬하면 친구로 변한다. 인간관계를 잘하고 좋은 인맥을 얻으려면 두 가지를 잘 버리라.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받으려는 태도다.

 한 아내는 결혼기념일이나 자기 생일에 “남편이 알아주나.” 하고 노렸다가 그냥 넘어가면 그때부터 삐쳐서 한 동안 말을 안 한다. 그러면 삶이 피곤해진다. 결혼기념일에 무엇인가를 바라면 “어디 두고 보자.”라고 사랑을 시험하지 말고 그냥 아침에 말하라. “여보!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조금 일찍 들어오세요.” 자기 기준으로 사랑의 증거를 만들어 놓고 그 증거가 없다고 “내가 사람 잘못 봤어.”라고 하면 불행해진다. 남을 생각하고 주려는 마음을 가질 때 인간관계도 잘할 수 있고 하나님관계에서도 승리하고 결국 반전의 역사도 이뤄진다.

3.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등 뒤에 던져버린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하셨다(10-16절). 그 예언대로 여로보암의 아들이 죽자 온 이스라엘이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슬퍼했다(18절). 여로보암과 달리 그의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뜻을 품었다. 그래도 여로보암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의 아들이 죽었다. 때로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에게 불행이 닥친다. 반대로 부모의 신앙과 헌신은 자녀의 축복과 행복의 길을 닦는 것이다.

 요새 각 가정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벽이 높아지고 있다. 그 벽을 깨뜨리고 가정을 회복시키려면 무엇보다 부모가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자녀를 양육할 때 ‘말수’는 줄이고 ‘말씀’은 많이 들려주라. 특히 자녀에게 하는 잔소리는 줄이고 하나님께 하는 기도소리는 늘릴 때 삶의 과정에 어느 정도의 고난은 있어도 반드시 최종적으로는 승리할 것이다.

 자녀 앞에서 자기중심주의와 물질과 축복에 안달하는 모습을 버리고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의 모범을 보이라. 특히 자녀 앞에서 티내지 않고 조용히 말씀과 기도를 앞세워 살면 자녀도 부모의 신실한 믿음과 기도를 느끼면서 바른 길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현재 모습은 부족해도 나의 앞날과 나의 자녀의 앞날은 얼마든지 찬란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악한 왕 여로보암으로부터 선한 자녀 아비야가 나왔다. 그처럼 아무리 힘든 현실에서도 멋진 반전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새롭게 일어서라.

< 반전의 역사를 이루라 >

 필자에게 목사의 길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24세 때까지 남 앞에만 서면 말을 더듬었기 때문이다. 대신 몸으로 섬기는 선교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1987년 선교사의 비전을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신학대학원 2년 때 저의 달란트를 따라 직접 선교사로 나가기보다 문서 선교와 후방에서 선교사를 지원하는 사역으로 비전을 수정했다. 그리고 1991년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 소속 사역자로 문서 선교와 선교사 양성 비전을 품고 귀국했다.

 당시 미국 선교본부는 한국 선교에 관심이 없었지만 저는 선교 지원 및 자원 국가로서 한국의 잠재력을 믿었다. 그렇게 귀국할 때 가진 것은 비전밖에 없었다. 동역자와 재정과 교단 배경이 없어서 한국에서 초창기 사역은 고독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외 여러 교회에서 청빙제의가 있었다. 좋은 조건을 제시받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조건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것은 큰 죄예요.”라는 아내의 말이 비전 유지에 큰 힘이 되었다.

 만약 좋은 조건에 따라 비전을 수정한다면 그때는 비전이 야심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야심이 있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덕도 아니다. 비전은 나를 포기하면서 가지는 찬란한 꿈이다. 안정된 교회 목사 자리보다 선교 비전을 붙드는 모습이 어리석게 보여도 원래 선교란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야 이뤄진다. 어떤 사람은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너무 현실만 보면 진실은 모습을 감춘다.

 사역이 조금 커져서 2002년 선교 단체를 세우고 그 명칭을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딴 요삼일육선교회(John316 Mission)라고 붙였다. 점차 비전의 열매가 생겼다. 인터넷 말씀 사역으로 비전 동역자도 조금씩 생겼다. 문서선교를 담당한 미션퍼블릭 사역도 점점 확대되고 <온라인새벽기도> 말씀 독자도 점점 많아지면서 마침내 <월간새벽기도>가 발행될 수 있었다. 신기루 같은 비전이 신기하게 현실화되는 것을 보면서 비전이 있을 때 반전도 있음을 실감한다.

 비전의 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역자다. 선교는 혼자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한국 총회가 없을 때 가끔 미국 총회에 참석하면 동료 목사들의 얼굴만 봐도 힘이 나고 연로하신 선배 목사들이 “이 목사님, 힘들지요.”라고 하면 나를 알아주는 같아 그 한 마디만으로도 마음의 상처가 단번에 아물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는 선교사에게 “선교사님, 힘들지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에 큰 위로를 받는 선교사가 많다.

 사람에게는 서로의 눈물을 씻어주는 좋은 비전 동역자가 필요하다. 기술과 의욕과 실력과 자본보다 ‘나를 일으키는 너’가 더 소중하다. 비전 동역자는 희망의 전조다. 목사와 성도가 좋은 비전 동역자가 되어 목사는 말씀으로 좋은 성도를 길러내고 성도는 기도로 좋은 목사를 길러내는 은혜의 순환이 있을 때 꽃봉오리의 비전은 마침내 꽃핀다. 필자는 말씀을 전할 때마다 누군가가 은혜 받고 새벽이슬과도 같은 좋은 비전 동역자가 생겨나기를 꿈꾼다. 그런 동역자가 되어 좋은 후대 양육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면 남은 인생에서도 멋진 반전의 역사를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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