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란 무엇일까요?
혹자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자를 합친 말이기 때문에 '언어의 사원'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혹자는, 말씀 언(言)에 모실 시(侍)에서 사람 인(人)이 생략된 상태로 합쳐진 말인데, 모실 시(侍)가 의지
지(志)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의지를 말로 표현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는 것이 바로 시(詩)라는 글자이지만,
이 시(詩)라는 낱말 안에는 단순한 문법으로 쉽게 규정 지을 수 없는 보다 폭넓은 의미가 담겼습니다. 시(詩)의 의미를 만든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시(詩)에는 시간 시(時)가 녹아들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詩)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언제나 제각각이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창동 감독의 시(詩)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1960년대 트로이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한국영화계를 이끌었던 왕년의 톱스타 윤정희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백건우와 결혼하여 홀연히 프랑스로 떠나가 우리의 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랬던 왕년의 톱스타 윤정희가 영화 <시>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그녀의 현재 모습은 많은 주름살로 인해 과거의 생기발랄했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시간 앞에서 그녀 역시도 굴복하고만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머니상이라는 이미지를 지닌 명배우인 김영애씨는 2004년에 '나이 60이 넘어가자 더 이상 시청자들께 자신의 예쁜 모습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연기를 하기가 싫어졌다.'라는 이유로 돌연 은퇴 선언을 한바가 있습니다.
예쁜 여성일 수록 자신의 예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하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심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김영애씨는 2006년에 드라마 <황진이>를 통해 다시 컴백 하긴 했지만... 아마도 그녀는 평생 동안 해온 연기가 바로 자신의 삶과도 같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컴백을 한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는 윤정희씨는 왜 다시 컴백한 것일까요?
저는 그 답을 영화 <시> 속에서 찾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는 나이 66세에 혼자 사는 노인입니다. 그녀는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자신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항상 형편에 맞지 않게 한껏 멋을 부리는 편입니다.
(배우 윤정희의 본명은 공교롭게도 '손미자'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없으며, 자식의 경우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은 이혼 후 자신의 아들을 엄마인 미자에게 맡긴 후 부산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미자는 자신의 손자 종욱을 홀로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굼핍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생활보호대상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미자는 손자를 키우며 살아가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풍을 앓고 있는 강회장(무슨 회장인지는 알 수 없습이다.
다만, 그의 며느리가 수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습니다.)의 병수발을 하는 간병인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987년에 방송을 시작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KBS 드라마인 <TV손자병법>에서 '장비' 역할을 맡았던 배우인 김희라씨가 중풍에 걸린 강회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인가 봅니다.
미자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께서 '미자는 커서 시인을 해도 되겠다'라고 칭찬을 했던 것이 생각나 시를 써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문화회관에서 진행하는 시창작 특강에 참여하게 됩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에 작은 강의실에 학생 처럼 앉은 미자는 과거를 회상하며 소녀처럼 설레임을 느낍니다.
문화회관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는 김용탁 시인(김용택 시인이 연기했습니다)은 사과를 꺼내면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과를 몇 번이나 봤지요? 백 번? 만 번? 백만 번? 모두 틀렸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과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처음 사과를 보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것의 시작은 사물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과를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세요."
미자는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 홀로 식탁에서 사과를 바라봅니다.
시 한 편을 완성해 보는 것이 그녀의 간절한 목표이기 때문에, 사과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매우 진지합니다.
간절하게 바라보았으나 결국, 그녀는 사과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시상을 전혀 찾아내지 못합니다.
답답함을 느낀 미자는 사과를 깎아 먹으며 말합니다.
"역시 사과는 보는 게 아니라 깎아 먹는 거야."
미자는 시를 완성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시상을 찾기 위해 그동안 자신이 미처 자세히 바라보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자세히 바라봅니다.
설거지통 속에도 시상이 숨어 있다는 김용탁 시인의 말로 인해 그녀는 설거지통을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며, 마당의 평상에 앉아 푸른 잎새가 돋아난 나무를 유심히 관찰하기도 합니다.
시상을 찾고자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파랑새를 찾고자 긴 여행을 떠도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인생의 황혼에서 어두운 먹구름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그 먹구름을 무시한 채 시를 쓰기 위해 한가로운 마음으로 꽃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불행이 닥칩니다.
그녀의 불행은 속물 연기의 달인인 기범이 아빠 역의 영화배우 안내상씨가 맡았습니다.(위의 사진에서 오른쪽)
안내상씨의 속물 연기는 이미 연기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속물스러움을 경멸하며 멀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미자와 속물스러움의 대명사인 기범 아빠(안내상)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극과극의 캐릭터이지만, 이들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에 휘말립니다.
그 사건이 미자에겐 커다란 불행이자 재앙입니다.
미자는 손자를 매우 사랑합니다.
어느 정도로 손자를 사랑하냐 하면,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게 뭐지?"라고 미자가 묻자,
"종욱이 입에 밥 들어가는 거."라고 손자가 대답할 정도로 그녀는 손자 종욱을 끔찍히 사랑합니다.
그토록 끔찍히도 사랑하는 손자가 범죄를 저지르면서 미자의 불행은 시작 됩니다.
미자의 손자는 친구 여섯 명과 함께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희진을 수개월 동안 집단 성폭행을 했는데,
그 소녀가 자살을 하고 소녀가 쓴 일기장을 그녀의 부모가 발견하여 학교에 제보하게 되면서 문제가 터지게 되었습니다.
학교의 교감선생님은 집단성폭행 사건이 표면화 되면은 학교의 관리자 입장에서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건을 쉬쉬 덮으려 합니다.
그래서 교감은 경찰이 이 사건을 표면화 시키는 것을 막고, 집단성폭행을 저지른 여섯 아이의 부모(보호자)에게 3,000만원 정도를 자살한 희진의 부모에게 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도록 종용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계속 된 집단 성폭행으로 인해 고통을 받다 자살한 소녀의 죽음을 돈 몇 푼으로 무마 하려는 아주 더럽고 속된 현장이지만, 미자는 사랑하는 손자가 감옥에 가는 것을 두고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공모에 동참하게 됩니다.
학부모들은 각자가 500만원 씩을 부담해서 자살한 희진의 어머니에게 합의금으로 주자고 의견을 모읍니다.
그런데, 생활보호대상자인 미진에게 500만원이라는 목돈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때문에 그녀는 이날부터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돈 500만원을 모아야만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여담이지만, 합의를 종용하는 교감선생님 역할을 배우가 바로 전 MBC 사장이자 18대 국회의원인 최문순 의원님이었습니다.
교감선생님으로 나온 최문순 의원님과 그 옆에 앉은 조한기 보좌관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진지함이 가득한 극장에서 빵~!하고 터지고 말았습니다.
영화의 분위기 상 도저히 웃음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전혀 예기치 못한 장면에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자는 손자와 친구들이 수개월 동안 집단성폭행을 저지른 장소인 학교의 과학실을 드려다 봅니다. 시상을 찾기 위해 사물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은 어느새 자살한 희진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조용히 쫓기 시작합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성당에 들렸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자살한 희진을 위한 미사가 진행 되고 있었습니다.
미자는 자신의 손자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자살한 어린 소녀의 사진을 바라보며 형용할 수 없는 큰 고통에 빠져듭니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병원에 찾아가자 의사는 그녀에게 초기 알츠하이머 증상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내립니다.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자는 손자를 맡긴 채 홀로 부산에서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말합니다.
"별 이상은 없고. 그냥 운동 부족이래..."
알츠하이머로인해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 뿐인 손자는 집단성폭행을 저지르고도 스스로가 저지른 죄를 반성하긴 커녕, 자신이 저지른 죄를 외면하고 있으며, 평소 같았다면 어울리기도 싫었을 속물 같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자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합의금 500만원을 빨리 구해오라고 닥달합니다.
시간이 자날 수록 점점 초라하게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시를 써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기엔 그녀에게 닥친 현실이 너무나도 막막할 따름입니다.
결국, 미자는 샤워기를 틀어 흐르는 물줄기 아래에서 그동안 억눌러 왔던 슬픔을 토해내며 눈물을 쏟아냅니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의 무게가 점점 암담해져 갈수록 그녀는 시를 쓰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이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시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 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 노력하며 가슴속이 타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현실 속에서 미자는 좀처럼 시상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시상을 찾게 되는데, 그녀가 시상을 찾게 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알츠하이머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모두 잊어버린 상태에서입니다.
그녀는 치매로 인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농촌의 땅바닥에 떨어진 살구를 주워 먹으며 자신도 모르게 시상을 말합니다.
"살구는 제 한 몸을 내던져서 다음 생을 준비한다."
시를 쓰기 위해, 혹은 자신에게 닥친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손자에게도 직접적으로 성폭행에 대한 꾸지람을 내리지 않았던 미자는 시상을 찾아 자살한 희진의 뒤를 쫓아 시상 속에서 희진의 삶을 점점 깊이 찾아내면서 결국 분노를 토해냅니다.
그녀는 캄캄한 새벽에 잠들어 있는 손자를 깨우며 절규합니다.
"일어나 .일어나 . 할머니가 할말있어 일어나라니까! 왜 그랬어? 왜 그랬어!"
그녀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손자는 그녀의 질책을 외면한 채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만 합니다.
결국, 미자도 더 이상 손자 종욱에게 희진을 죽도록 만든 일에 대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두 조손은 마치 희진이라는 소녀가 수개월 동안 집단성폭행을 당해 고통을 받다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라도 한 것처럼 지내지만, 그 침묵의 이면에는 당장이라도 폭발 할 것만 같은 불안함이 내포 되어 있습니다.
미자는 종욱은 희진을 언급하지 않은 채 마당에서 베드민턴을 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
누구의 시선도 존재하지 않는 곳.
자신이 혼자만 있다고 생각될 때 미자는 순수한 모습을 되찾습니다.
그녀가 노래방에서 홀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은 채 노래 그 자체를 즐기는 편안한 모습입니다.
노래방 벽에 붙은 르누아르의 <이레느 깡 단베르양의 초상>은 아름다운 소녀의 초상화입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도 화려한 색채를 사용해 탐미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르누아르의 그림 중, 가장 아름다운
초상화로 손꼽히는 소녀의 그림이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잊은 미자의 마음을 투영하기라도 하듯이 벽에 붙어있습니다.
모자를 달려보내는 바람 앞에서 미자는 자유를 느낍니다.
그녀는 자유를 통해 해방감을 느낍니다. 희진이 뛰어든 강물을 바라보면서도 그녀는 자유를 느낍니다.
자유는 그녀에게 시상을 안겨줍니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미자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합니다.
완성한 시의 시상 속에는 그녀가 느꼈던 시상들, 죽은 희진으로 부터 받았던 시상과, 알츠하이머로 인하여 점점 사라져만 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시상과, 손자로 인해 얻게 되었던 시상 등 그녀가 영화
<시>에서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얻었던 시상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한 편의 시를 완성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시창착 수업시간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이야기 하는 장면입니다. 미자와 함께 강의를 듣는 나이 많은 학생들이 한 명 한 명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는 모두 고통화 불행이 행복과 함께 혼재 해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모두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순간을 시로 승화 시키진 못합니다.
한 달 동안의 강의가 끝난 후, 한 편의 시를 완성한 학생은 오직 미자 뿐입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시를 완성하지 못한 채 시를 완성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만 말합니다.
그러자 김용탁 시인이 말합니다.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운게 아니라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는게 어려운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여백이 매우 많은 영화입니다.
때문에 사람에 따라 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바로 자유를 노래하는 영화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금기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이건 해도 된다.'라는 말 보다는 '하지 마라!'라는 말로 아이를 교육합니다.
아이들은 성장해 가기 시작하면서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자신의 이미지가 망가질 수 있는 일들을 금기로
규정하여 스스로 그 금기 속에 갇혀 살아갑니다.
미자는 생활보호수당을 받는 66세의 늙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불쌍한 노인으로 보이는 것이 싫어서 언제나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습니다. 또한 그녀는 다른 사람 앞에서 크게 화를 내지도 못하며, 슬픈 일이 있더라도 샤워기를 틀어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만든 뒤에 울거나, 술에 취해서 자제력을 상실 했을 때에만
눈물을 흘립니다.
24시간 내내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정도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6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체득한 '금기'의 교육으로 인해 언제나 자신을 금기의 틀 안에 가둔채 살아갑니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은 인간에게는 사회성의 상징인 페르소나가 존재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여 그 페르소나에 자신의 삶을 맞춰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정이나 회사, 동호회, 동네 등 다양한 사회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페르소나 역시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가족에게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직장에서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학교에서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동네에서 이웃들에게 보여지는 '나'의 모습은 모두 다르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페르소나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상실한 채 표류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사람의 삶입니다.
페르소나를 벗으면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평생동안 받은 금기의 교육으로 인하여 자신이 페르소나를 걷어낼 때,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지에 대해
사람은 누구나 커다란 불안감을 느끼는 나머지 자신의 참모습을 숨기려 노력합니다.
시상은 그런 껍데기들을 벗어던질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만든 금기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투영 시킬 때, 시상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승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모든 집착을 벗어 던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고승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모든 집착을 버렸으나, 그 모든 집착들 보다도 훨씬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집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를 쓰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써야만 한다는 집착과 시상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집착을 가지게 되면, 결코 시상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시를 써야 한다는 집착이 만들어낸 새로운 페르소나가 생겨나게 될 뿐입니다.
때문에 시를 쓰기 위해선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금기를 해체하고, 목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합니다.
영화 <시>에서 미자의 역할을 맡은 배우 윤정희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스스로가 만들었던 금기를 모두 버렸습니다. 자신의 본명 처럼 되어버린 윤정희라는 가명 대신 미자라는 본명을 영화에서 사용 했으며,
'아름다운 모습'만을 기억 되고자 하는 여배우로서의 집착 역시 버렸습니다.
그녀는 66살의 노인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과 자신의 삶이 이미 절정기를 지나 쇄락해 가고 있다는 쓸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등을 여과 없이 투영했습니다.
즉, 영화 <시>의 주인공 '미자'를 통해 배우 '윤정희'의 삶을 담아낸 것입니다.
때문에 윤정희의 연기에는 아주 묵직한 무게감이 있으며, 그 무게감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숨을 콱콱 막히게 만드는 압력을 행사합니다. 배우 윤정희가 만들어낸 압력, 그것은 바로 그녀가 쓴 연기로 표현한 시(詩)일 것입니다.
배우 윤정희처럼 스스로의 금기를 깨고, 솔직하게 자신의 투영하면서 집착마저도 벗어던진다면,
그 순간 누구라도 뛰어난 시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시를 쓰겠다는 마음, 스스로의 금기를 부수고 그동안 감추어 왔던 내면을 외부 세계에 공개했을 때,
큰 비난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순간, 우리는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이 시를 쓰겠다는 마음이 어려운 것입니다.
스스로를 구속하는 모든 금기로부터 탈출하여 스스로가 만들어낸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때
결코 그동안 누릴 수 없었던 근원적인 자유를 통해 시(詩)는 완성 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소설가 출신의 연출가인 이창동 감독에게 있어 시(詩)란 바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얻어낸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리뷰 - 스포일러 有
(너무 좋아서 허락없이 펌했습니다 삭제하라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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