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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여장군 할머니

Joyfule 2024. 5. 3. 01:1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여장군 할머니  

 

변호사를 하면서 사십년 가까이 죄인들과 만났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

“판사 앞에서는 반성했다고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해요.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예요.

나는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이 아프지를 않아요. 남들은 아프다는데 나는 왜 그렇죠?”​

그렇게 말하는 그는 진심이었다. 악마가 스며들어 양심을 제거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평생을 도둑질만 해 온 사람과 얘기를 했었다. 그는 어려서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은수저를 훔친 것을 시작으로 팔십 노인이 돼서도 전원주택을 털러 다니고 있었다.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있을 때에도 그는 그 짓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도벽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웃으면서 “프로는 은퇴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에게 작가 쟝주네가 쓴 ‘도둑 일기’라는 책을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인간의 나라와 도둑의 나라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인간의 나라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아야 하는 게 윤리지만 도둑의 나라에서는 비싼 물건을 솜씨 있게 가져오는 게 영웅이라는 것이었다. 도둑인 그는 자신은 보통 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부자의 청부를 받은 살인범이 시간을 아껴가면서 성실하게 공부하던 여대생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매장한 사건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살인범에게 왜 죽였느냐고 물었다. 그는 감정은 없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신용을 지키느라고 죽였다고 했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는 법정에 나와 그 범인을 죽여달라고 절규했다. 재판장은 자기도 사형에 처하고 싶은데 판사생활동안 사형을 선고한 적이 없어서 그렇게 안 하겠다고 하면서 살인범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인간의 껍데기를 썼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다양한 것 같았다. 흉악범들을 만날 때면 나는 그들의 영혼에서 쥐도 보이고 뱀도 보이고 여러형태의 짐승을 보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도덕성을 결한 최하등의 인간들 중에는 짐승의 영을 가진 존재들도 있는 것 같았다.​

변호사로 민사소송을 맡아서 하다 보면 보통사람들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기도 한다. ​

상가의 사기분양사건의 피해자들을 대리해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상가를 사두면 그 임대료로 평생이 보장된다는 거짓 광고를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피해자 대책 회의에 참석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골치 아프게 소송을 하지 말고 우리도 똑같이 광고해서 다른 사람들이 상가를 사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단체로 사기를 쳐서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게 하자는 얘기였다. 자기의 이익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그중에는 사기범을 찾아가 자기 돈만 내주면 남이야 어떻든지 사기범을 돕겠다는 배신자도 있었다. ​

어떤 사람은 변호사인 나를 찾아와 자기만 제일 먼저 돈을 받게 해달라고 했다. 인간은 한순간에 나쁜 사람도 교활한 사람도 될 수 있고 비겁한 존재도 될 수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손해를 봐도 나만 이익을 보고 잘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이 어떻게 되든 그 자신은 어려움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한 명의 ‘진짜 인간’을 보았다. 남대문 시장의 노점에서 사십년간 떡뽁이를 팔아온 가난한 칠십대 여성이었다. 얼굴의 굵은 주름 사이마다 힘든 세월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모두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면 법을 잘 아는 지능적인 사기범에게 농락당합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겠습니다. 제일 늦게 돈을 받겠습니다. 못 받아도 좋습니다. 평생 고생하다가 말년에 좀 편해 보려는 욕심을 냈다가 당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팔자로 받아들여야죠. 그렇지만 우리가 단결해야 사기범들이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합쳐 법의 미꾸라지를 잡읍시다.”​

그 노인을 보면서 나는 멋있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위기의 순간 남들을 위해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기의 피해자 중에 시장 바닥에서 떡볶이를 팔던 그 노인이 가장 가난했다. 돈에 여유가 있어서 투자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재산의 일부를 잃지만 그 노인은 평생 번 돈의 전부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노인의 헐벗고 초라한 이면에서 숭고함을 보았다.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그분의 음성이다. 그 음성이 들리지 않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이미 천형을 받은 살덩어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