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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혼의 별나라 여행

Joyfule 2024. 5. 4. 19:22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혼의 별나라 여행  

 

일주일 사이에 여러 명이 죽었다. 고교동창의 부고도 있고 친구의 부인이 죽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까 더 이상 죽음이 생소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죽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훌쩍 먼 나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경을 보면 인생 칠십이고 강건해도 팔십이라고 한다. 백세시대라고 말은 하지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수명은 칠십대에서 대충 끝이 나는 게 아닐까. 나는 운 좋게 기본적인 수명은 확보했고 지금은 하루하루를 보너스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산다는 게 뭘까. 진짜 살아있으려면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본다. 사십대 중반까지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자아가 강했다. 그러다 암을 선고받고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기주의자에게서 ‘나’라는 게 없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베푼 사랑이 없으니 그 누구의 가슴에 추억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이기주의자의 죽음은 메마르고 냄새조차 없는 텅 빈 공허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죽어갔다.

오십대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초가을 바람에 윤기를 머금은 낙엽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내려오는 것 같았다.

육십 대의 죽음들은 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몇 장의 낙엽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낙엽들은 떨어지는 자리를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칠십대에 도달했다. 주위의 죽음이 초겨울의 스산한 저녁 빛 속에 우수수 떨어지는 메마른 낙엽 같은 느낌이다. 그런 죽음들을 보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내 삶에서 에너지의 잔고는 어느 정도인지. 남아 있는 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생각해 본다.​

사흘전 옥계 해변에 사는 심 선생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은행원이던 그는 일찍 낙향을 해서 바닷가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다. 바닷가의 짙은 안개가 사람이 춤추는 것 같은 것을 보고 그는 사는 집의 이름을 ‘무율제’라고 지었다. 얘기 중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제 나이가 팔십이 됐습니다. 여생을 사년 정도로 잡고 있어요. 그 제 삼의 인생은 누구에게도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편하게 집에서 죽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인연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봉사활동도 중단하려고 합니다. 삶의 마지막을 아내와 함께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두 달씩 살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더 공부하고 싶어요.”​

그를 보면서 나는 훌륭한 선생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는 제 일의 인생을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제 이의 인생은 옥계의 바닷가마을에 내려와 ‘시경’을 공부하고 해변을 산책하고 봉사활동을 해 왔다. 그는 일찍 직장을 그만두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은행원 시절만 해도 누구에게 특혜 대출해 주라는 압력이 많이 내려왔죠. 성격상 그걸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게 직장을 빨리 그만두고 해변가 마을로 내려오게 된 동기죠. 남들은 바닷가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텃밭을 가꾸는데 거기 사는 벌레가 손을 무는 거예요. 여기는 내 땅인데 왜 침입을 하느냐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작은 일 하나에서도 깨닫는 게 있었죠. 저는 집에 담이나 문을 만들지 않고 개방했죠. 커피를 로스팅해서 마을 사람 누구나 와서 커피를 공짜로 마시게 했죠. ”​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남들은 일찍 사표를 내고 어떻게 이렇게 신선놀음을 하며 살아올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지기도 하죠. 내가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혹시 직장에 있을 때 부정이라도 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다만 개발 시대를 살아온 덕분에 이렇게 살 수 있었어요. 서울의 집값이 치솟는 바람에 바닷가 어촌의 싼 집을 사고 그 차액으로 살 수 있었어요. 혜택을 받은 거죠. 인구가 줄면서 지금은 바닷가의 빈 집에서 고양이들이 살아요. 젊은 사람들이 내려오면 괜찮을 겁니다. 남들은 쓸쓸한 바닷가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지레 짐작하지만 살아보니까 괜찮았어요.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

그는 알찬 삶을 살았고 동시에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백 퍼센트 확실한 일이다. 지구로 왔던 영혼은 우주로 떠나 또 다른 별로 가는 건 아닐까. 따분한 우주 여행중 깊은 잠 속에 들었다가 다른 별에 도착했을 때 깨어나는 건 아닐까.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채 다른 별로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