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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50과)1.

Joyfule 2010. 10. 26. 07:46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50과)1.

다니엘(4): 미래 역사를 주관 하시는 하나님 (10-12장)

 

 둘째 이야기: 미래의 세계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7-12장)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 하에 흘러가고 있는가 ? 거대한 왕국에 포로로 잡혀와 소수 민족으로 흩어져 살며, 때로는 박해를 받으며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장래가 있는가 ? 유다 민족으로 남아서 수치와 박해를 받는 것보다 열강의 민족으로 귀화하여 살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 이같은 내적 회의를 품고 있는 포로들에게 (단 7-12장)은 어떤 답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 ?  그 동안에는 줄곧 주어를 3인칭으로 기술하던 다니엘서가 여기에서부터는 1인칭으로 변화한다. 이는 다니엘 자신이 직접 받은 환상이기 때문이다.


 

4. 마지막 이상(4) - 왕들의 전쟁(10-12장)

4-1. 선지자의 준비(10장)

 

 가. 이상이 나타난 때와 하늘 사자의 모습(10:1-9)

 나. 하늘 천사의 설명(10:10-14)

  천사는 다니엘을 깨어나게 하였으며, 다니엘이 스스로 겸비할 때에 하나님의 지시가 내렸으나 바사국군의 방해로 인하여 21일간 지연되었다. 그러나 미가엘의 도움으로 이제 도착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천사는 이제 전하려는 것은 오래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일이라고 함.


 
다. 예언자의 새 힘(10:15-21)
  그러나 다니엘은 힘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이 때에 천사가 다니엘을 향하여 두려워 말고 평안하라, 강건하라고 외칠 때에 다니엘이 힘을 회복하였다. 천사는 후에 바사 군과 헬라 군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천사는 미가엘만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


4-2. 두 번째와 세 번째 왕국 지배하의 이스라엘 역사(11:1-35)

 가. 바사 아래에서의 역사(11:1-2)
  다니엘은 메대 왕 다리오 원년에 그를 돕고 강하게 하였다. 다니엘은 바사의 왕들과 헬라가 일어나서 바사를 칠 것을 예언하였다.

 나. 헬라 치하에서의 역사(11:3-35)

  가) 알렉산더의 출현(1:3-4)
  헬라의 알렉산더의 정복과 그 죽음과 그의 사후에 네 나라로 갈라질 것을 예언함.(셀류커스-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프톨레미-이집트-, 리시마쿠수-트라스와 소아시아 일부-, 카산더-마케도니아와 헬라-)


 

  나) 남방 왕과 북방 왕-프톨레미와 셀류커스와의 분쟁(11:5-20)

 

(단 11:5-35)에 나타난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시드 왕조

프톨레미 왕조(남방왕 이집트)

셀류시드 왕조(북방왕 시리아)

프톨레미 1세 소터(323-285)(5절)

셀류커스1세 니카토 (321-281년)(5절)
안디오커스 1세 소터(281-262년)(6절)

프톨레미2세 필라델푸스(285-246)(6절)

안디오커스 2세 테오스(262-246년)(7-9절)

프톨레미3세 유게테스(246-221)(7-8절)

셀류커스 2세 칼리니쿠스(246-227)(10절)

프톨레미4세 필로파터(221-204)(9-11절)

셀류커스 3세 소터(227-223년)(10-11절)

프톨레미5세 에피파네스( 204-181)(17절)

안티오쿠스 3세(223-187년)(13-14,19절)

프톨레미6세 필로메터(181-145)(25절)

셀류커스 4세 필로파토(187-176년)(20절)

 

안티오쿠스4세 에피파네스(175-163)(21-32절)

 

 11:5 - "남방 왕은 강할 것이나"
  프톨레미 1세인 소터는 알렉산더를 섬기다가 주전 323년에 이집트를 다스릴 권한을 얻었고 304년에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셀류커스 1세인 니카토는 알렉산더의 장군으로 321년 바벨론을 다스리도록 임명을 받았다. 안티고너스가 바벨론을 공격하게 되자  셀류커스 1세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1세에게 도움을 청하여(주전 316년) 안티고너스를 물리쳤으며 305년에는 왕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셀류커스 1세가 지배한 영토는 프톨레미 1세의 영토보다 넓었다.

 11:6 -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맹약하리니"
  이집트에서 프톨레미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필라델푸스가 왕이 되어(주전 285년) 약 40년간을 다스렸고(246년까지), 이 시기에 시리아에서는 왕이 두 번 교체되었다. 셀류커스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안디오쿠스 1세가 주전 281-262년까지 약 20년간을 통치하였고, 그 뒤를 이어 셀류커스 1세의 손자인 테오스(안티오커스 2세)가 주전 262-246년까지 다스렸다. 시리아의 왕 테오스(안키오커스 2세)는 처음에 필라델푸스(프톨레미 2세)와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전 250년에 이르러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 동맹은 필라델푸스가 자기 딸인 베레니스를 테오스에게 줌으로서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테오스에게 버림 받은 전처인 라오디스가 원한을 품고 베레니스와 테오스를 독살하고 자기 아들인 칼리니쿠스(셀류커스 2세)를 왕으로 삼았다. 그는 시리아를 주전 246년부터 227년까지 통치했다.

 11:7-8 - "그러나 이 공주의 본족 중에 난 자가"
  그러나 베레니스의 형제인 유게테스(프톨레미 3세; 주전 246-221년)가 그의 아버지(프톨레미 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자, 그의 누이인 베레니스를 죽인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그는 시리아를 공격하여 자기 누이를 죽인 라오디스를 이고 북방 왕(시리아 군)을 정복하였으며 전리품을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왔다.

 11:9-10 - "북방 왕이 남방으로 쳐들어 갈 것이나"
  칼리니커스(북방왕)는 이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이집트를 치려 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였다. 그는 낙마로 인해 죽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소터(셀류커스 3세; 227-223년)가 뒤를 이엇는데, 그는 소아시아 군사 원정 중에 음모로 인해 죽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형제인 안티오커스 3세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223-187년).

 "두 아들들"
  셀류커스 3세와 안티오커스 3세는 군사 정복으로 시리아의 훼손된 이익을 찾으려고 하였다. 큰아들은 소아시아로 진격하고 작은아들은 이집트로 진격하였다. 이때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포함된 시리아 변경까지의 북쪽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안티오쿠스 3세는 이 때의 원정(219-217년)을 통하여 이집트 군을 이스라엘 남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1:11-13 - "남방 왕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과 싸울 것이라"
  시리아의 두 왕의 공격을 받은 필로파터(프톨레미 4세; 221-204년)는 그들과 대항하여 큰 무리를 죽였으며, 안티오커스 3세의 침략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에 안티오커스 3세 대왕은 다시 대군을 모아서 이집트 왕 필로파터를 물리쳤다.

 11:14-17 - "그 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을 칠 것이요"
  그 때에 이집트는 여러 나라의 공격을 함께 받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와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이집트를 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싸움을 통해 이집트와 시리아로 부터 독립해 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안티오쿠스 3세는 전쟁 후에 이스라엘에 대한 지배를 더욱 공고하게 했으며, 시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마저 관할하였다. 그는 자기의 딸을 이집트의 왕인  에피파네스(프톨레미 5세; 204-181년)에게 결혼시켜 이집트와 시리아 간에 평화를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이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1:18-19
  안티오쿠스 3세는 197년에는 소아시아, 그리고 192년에는 헬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로마에서 한 장군(코넬리루스 스키피오)이 파견되어 그의 원정을 돌이키게 하여 그는 결국 188년에 자기 땅으로 돌아와야 했으며, 그 곳에서 1년 후에 죽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헬라를 통합하기 위해 수많은 군사 원정을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1:20
  안티오커스 3세를 이어 시리아의 왕이 된 그의 아들인 필로파터(셀류커스 4세; 187-176년)는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재무관 헬리오도러스에게 독살되어 싸움도 없이 망하였다.


 
다) 에피파네스(안티오쿠스 4세)에 관한 예언(21-35)

  안티오쿠스 3세 대왕의 뒤를 이어 시리아의 왕이 된 사람은 에피파네스(안티오쿠스 4세; 175-163년)였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현저한 자"라는 뜻을 가진 '에피파네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바꾸어 "미친 자"라는 뜻을 가진 '에피마네스'라고 불렀다. 그는 필로파터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이때에 이집트와 유대인이 동맹하여 그를 공격하였는데 에피파네스는 그들을 격파하고 이집트와 동맹한 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폐위시켜 버렸다(21-22). 이 승리로 인해 에피파네스는 비교적 적은 군사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자기의 무리들에게 주려고 하였다(23-24). 안티오쿠스는 나라를 안정시킨 후에 이집트를 공격하였다(170년). 이집트는 수많은 대군을 이끌고 펠루시움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에피파네스에게 패배하였다. 그들은 한 밥상에 앉아 서로 평화 조약을 맺으려 하였지만 서로 속였기 때문에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25-27).

  안티오쿠스는 많은 재물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을 더럽힘으로 유대인들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거스렸으며 성전을 더럽힌 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28). 그는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이집트롤 치려고 왔으나 로마에서 파견된 깃딤의 배의 반격을 받았다. 로마 원로원인 포필리우스 라에나스는 안티오쿠스에게 이집트와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였으며 결국 그는 로마의 요구에 굴복하여 이집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29-30). 그는 또 다시 예루살렘을 더럽혔다. 그는 모세의 법을 제한하고, 언약을 버리는 자들을 후대하였으며(30), 성전 문을 닫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금지했다(31). 그는 군대를 보내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노예로 잡아갔고 도시를 약탈하고 방화했다.

 

  에피파네스는 유대주의를 종식시키고 헬라 화하기 위해서 할례와 절기와 같은 종교 관습을 금지하고 율법 서를 불태우게 하였다. 그는 성전 밖 번제 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웠으며(주전 167년 12/16), 그 제단에서 돼지를 잡았다(31). 그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우스를 섬기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 유혹에 넘어갔으나 소수의 무리만이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켰다(32). 그러나 안티오쿠스의 명령에 불복종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계속하여 가르쳤으며 그들은 칼과 불과 포로와 약탈을 당하여 순교를 하게 되었다(33). 주전 166년에 제사장 맛다디아스는 이 정책에 반항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의 5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하였다. 처음에는 적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많은 지지 세력을 얻게 되었으며, 안티오쿠스 4세가 바사에서 정신병으로 죽은 주전 164년 말에는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연단 되고 정결케 되었다(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