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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Joyfule 2014. 9. 4. 05:27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서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그것을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님이 무엇보다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의 교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하여 주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 주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자유롭게 주님과 교제하며 사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교제와 사랑은 진정한 교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교제입니다. 
그것만이 사람의 깊은 부분을 만족시킵니다.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시킵니다. 
주님은 우리와의 교제를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의 풍성하심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합니다. 
그가 가진 무한한 보화를 나누어주시려고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재산을 빼았거나 자녀를 통해서 어떤 이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주고 또 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자녀의 물질적인 선물이 아니라 
자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교제입니다. 
주님도 우리에게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의 숫자가 늘어나고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 그 자체가 주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 받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이란 주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되는 것도 
좀 더 깊은 주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자란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마음을 보여주시며 
좀 더 깊은 부분을 우리와 나누려고 하실 것입니다. 
오래 전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 교회에서 한 달 정도 잠을 자면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나는 정말 주님께서 교제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통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말입니다. 
나의 경우 기도는 어느 정도 한 편이지만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잠기는 것을 기뻐할 뿐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나 소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을 구해도 주님은 나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항상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달 동안 교회에서 잠을 자면서 기도할 때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나는 그저 주님 앞에 엎드려 있다가 밤이 깊어지고 졸음이 오면 그 자리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면 다시 엎드려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신선한 기쁨이 심령에 충만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이 되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이제는 일어나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이제 집으로 갑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너무나 선명하게 하나의 메시지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이제 가니..”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심령 깊은 곳에서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 속에 주님의 따뜻하고도 달콤하며 
애정 어린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좀 더 여기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 음성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 동안을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음성 가운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과 기쁨이 있었고 
사랑으로 가득한 주님의 마음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나는 한 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 감동 가운데 잠겨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선명한 주님의 가르치심을 경험할 때도 많았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갔을 때였습니다. 
층계를 올라서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입구에 
엄지손가락 정도로 큰 바퀴벌레 여러 마리가 바닥에 죽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임대한 건물이었는데 
그 건물 위층에는 갓 결혼한 마음씨 착한 새댁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새댁은 아침 일찍이 나와서 어딘가로 가곤 했는데 
나는 바퀴벌레를 보면서 그 새댁이 깜짝 놀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새댁이 오기 전에 바퀴벌레를 처리하려고 
휴지를 가지고 그 바퀴벌레를 잡았습니다. 
이때까지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조금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죽은 줄로 알았던 그 커다란 바퀴벌레가 
급하게 움직이면서 나의 손등 위로 마구 기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바퀴벌레를 처리하기는 했지만 너무 놀라서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주 선명한 주님의 메시지가 심령에 울려 퍼졌습니다. 
“놀랐느냐? 저 바퀴벌레의 모습이 바로 너의 모습이다.
저 모습이 평소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네 자아의 모습이다.” 
그것은 내게 아주 충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주님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께 꾸지람을 받을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꾸지람을 들으면 기쁘고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해서 울었습니다. 
나의 죄를 지적하시는 주님의 음성에는 
그분의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게 흘러넘쳤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음성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으면서도 너무 감사해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잔소리나 주의를 들을 때 대체로 거기에는 별다른 유익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비난과 거칠음이 동반되므로 도움이 되는 것보다 상처가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음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음성과 임재는 항상 많은 기쁨과 신선한 생기를 공급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기도 제목이 있어서 기도를 하는 것보다도 
주님과의 교제 자체를 기뻐하며 주를 구할 때 주님의 친밀함을 얻게 되며 
이를 통해 많은 영적 유익을 경험하고 내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나는 몹시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교회에서 잠을 자면서 기도하기로 작정을 했지만 
그날은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오늘은 그냥 집에서 기도하고 잠을 자고 싶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주님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오늘은 나 혼자 교회에서 지내겠다..” 
그 순간 나는 교회에서 조용히 혼자 앉아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쓸쓸하고 외로워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나의 말을 취소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지금 당장 교회에 가겠습니다..” 
나는 당장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도 천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과 혼자 조용히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잠을 자면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는 기쁨, 
주님과 교제하는 기쁨은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청년 시절 많은 시간에 교회에서 혼자 잠을 잤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교제가 너무나 황홀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도 어려웠고 나의 앞길에 대해서도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러한 기도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을 알고 싶다고 기도했고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천국이란 어떤 것인지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주님을 알아갈수록, 영혼이 눈을 뜰수록 
주님과의 거리에 의해 누리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얼굴 가까이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얻는 주님의 임재와 친밀감은 기도 중에 얻는 가장 귀한 보화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고 
하찮은 세상의 필요에 대해서만 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보화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얻은 자는 사과를 하나씩 딸 필요가 없으며 
황금덩어리를 얻은 사람은 푼돈을 얻으려 고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의 교제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주의 얼굴을 구할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을 아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이들에게 은총과 귀한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임하십니다. 
단순히 문제가 있을 때만 주님을 찾고 
주님을 해결사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문제의 해결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에 대해서 느끼고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생활하는 가정에서도 교회와 같은 지성소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정에서의 언어나 생활에 무척 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가 소멸되지 않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넣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동류입니다. 
같은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얻기 전까지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한때는 이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그것이 자기의 진정한 만족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다른 것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얻고 나면 
그것도 자기의 진정한 기쁨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도달하기 전까지, 
하나남과의 교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리의 알을 양계장에 넣어서 닭이 그 알을 품어서 부화시켰다 하더라도 
그 알이 부화되어 자라게 되면 자기의 동류인 오리를 찾아갑니다. 
그는 땅에서 놀지 않고 물웅덩이를 향해서 갑니다. 
아무리 엄마인 닭이 그를 막아도 그는 물속으로 갑니다. 
그리고 동류에게 갑니다. 
그것이 그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주님께 대한 사모함과 갈망이 근원적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갈망을 발견하고 주님을 추구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 영혼이 깨어나지 않음으로 그 갈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추구하고 자아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은 교제를 기뻐하십니다. 
그 교제를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기뻐할 때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무한하신 그의 은총과 자비를 공급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과의 교제처럼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우리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위하여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교제의 깊은 기도로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낮고 얕은 기도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얼굴을 행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아는 길이며 느끼는 길이며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알아가게 될 때 그는 세상의 아무 것도 부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거룩과 영광과 행복한 주의 임재 속에서 삶도 죽음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주의 임재 속에서 주의 얼굴을 보고 
천사와 같이 얼굴이 빛나며 행복에 잠겨 있었던 스데반처럼 말입니다. 
 - 정원 목사님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 속으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