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편견과 극단주의를 버리라

Joyfule 2023. 1. 30. 23:26





       편견과 극단주의를 버리라

 


필자는 청소년 때 종말론과 예언 등의 신기한 얘기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와 관련된 책을 많이 보면서 믿음이 공포심과 두려움의 기반 위에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체험하면서 호기심 위주의 초보 신앙은 없어지고 몸으로 섬기는 중견 신앙이 자리 잡으면서 깊은 평안을 체험했다. 잘못된 호기심은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면서 오히려 사탄이 임하는 통로로 이용된다.

 예전에 한 자녀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인류 종말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긴 나쁜 노래라는데 정말 그래요?” 믿음이 좋다는 학교 선배가 그런 얘기를 종종 한다는 것이었다. 그 자녀가 그런 질문을 하기 얼마 전에도 두려워하며 종말에 관한 질문을 해서 그때도 너무 종말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지 말고 약속을 붙잡는 믿음을 가지라고 해서 자녀의 마음에 평안을 준 적이 있었다.

 그 물음에 아빠가 대답했다. “얘야,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좋지만 떠도는 소문만 가지고 극단적인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 돼. 어떤 한 가지 문제로 극단적인 편견을 가지기에 전쟁과 학살이 생기고 불상의 목을 자르면서 자기 믿음이 좋다고 으스대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왜곡시켜 기독교를 욕 먹이고 참된 선교를 막는 사탄의 교묘한 전략이야. 앞으로 결혼 대상을 찾을 때는 극단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만은 멀리해라.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많이 힘들어져.”

 편견의 딱지 붙이기는 영혼의 파멸성과 비인격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선교하는 마음과는 180도 반대되는 마음이다. 딱지 붙이기를 즐겨하는 보수나 진보 신앙은 참된 진리보다는 인간 사상을 믿게 만든다. 그것은 참된 보수나 진보 신앙이 아닌 위험한 극단주의 신앙이다. 극단주의 신앙을 분별해낼 줄 알라. 어느 종교든지 극단주의 종교는 영적인 테러를 낳고 그냥 놔두면 언젠가 실제 테러를 낳는다.

 왜 종교인이 편견과 극단주의에 빠지는가? 자신의 무가치감을 남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믿음이 최고인 줄 알지만 사실상 그 믿음은 대개 불안하고 허약한 믿음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자신의 최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무가치감 속에 살면서 남을 정죄하고 깎아내려야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면 잘못된 것이다.

 극단주의는 스스로 고난을 벌고 징벌의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극단주의는 교만의 대표적인 산물이고 교만 중에 특히 영적인 교만은 가장 치명적인 것이다. 성도는 거룩한 분리도 잘해야지만 거룩한 포용도 잘해야 한다. 왜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동시에 비를 주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편견과 독선에 근거한 독일식 기독교로 사람을 죽이는 히틀러가 나온다. 그러므로 극단주의 신앙에 빠지지 말라.

 세상은 나를 높이려는 전쟁터다. 정당한 경쟁은 필요하지만 비겁하게 나를 높이려고 남에게 편견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제일 안 좋은 품성이다. 그런 언행을 멀리하고 그런 언행을 보이는 사람도 힘써 멀리하라. 초보적인 신앙은 내가 읽고 들은 것 몇 가지만 진리인 줄 아는 ‘편견의 딱지 붙이기’를 좋아하지만 성숙한 신앙은 시간을 두고 펼쳐가는 ‘진리의 담금질 과정’을 좋아한다.

 초보 운전자가 마구 운전하면 반드시 사고가 나지만 능숙한 운전자는 안전거리를 떼고 남이 갑자기 끼어드는 것까지 예상해 운전하면서 방향을 틀 때는 전후좌우는 물론 사각지대까지 보면서 방어운전을 하기에 몇 십 년 동안 무사고 운전을 한다. 신앙생활에서도 전후좌우를 보는 통전적인 사고를 가지고 겸손하게 이웃을 살피는 사람이 인생 및 신앙생활의 사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