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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여자의 일생(Une Vie)

Joyfule 2009. 6. 28. 00:44

    8.여자의 일생(Une Vie)

    이윽고 봄이 왔다. 나뭇잎들이 아직 투명해 보일 정도고 들은 축축했기 때문에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대개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에 숨곤 했다. 막사는 작년 가을 이래 보코트의 언덕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5백 미터쯤 떨어져 있고 계곡의 가파른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온종일 맹렬한 바람이 불어대는 어느 날이었다. 잔이 날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푸르빌 백작이 허둥지둥 찾아왔다. 안색이 몹시 창백해서 빨간 수염이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핏기 어린 눈은 사고력을 잃은 듯이 자꾸 움직였다. 백작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질베르트가 여기 와 있겠죠" 잔은 놀라서 대답했다. "아아뇨! 오늘은 통 안 보이셨는 걸요" 그러자 백작은 두 다리가 잘리기라도 한 듯이 털썩 주저 앉아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씻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내밀며 입을 딱 벌리고 무언가 무서운 괴로움을 호소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고서 상대방을 우두커니 보고 있더니 혼자 입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뛰어나갔다. 잔은 그 뒤를 쫓았다. 공포에 싸여 쥐어짜는 듯한 가슴을 안고 그러나 거인의 발걸음을 따를 수가 없었다. 백작은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를 따라 한사코 달렸다.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고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초목과 곡식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보코트 언덕이 보였다. 양이 없는 우리 한쪽에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가 있고 말뚝에 말 두 마리가 매어 있었다. 백작은 땅에 엎드려 그 막사 옆으로 접근해 갔다. 두 마리의 말은 백작의 모습을 보자 몸부림쳤다. 백작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로 고삐를 끊었다. 말은 바람과 함께 뛰어갔다. 백작은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켜 문 틈에 눈을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백작은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일어났다. 이어 밖에서 대문 빗장을 힘껏 밀어 넣자 두 손에 막대기를 쥐고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그는 상체를 구부리고 죽을 힘을 다해서 황소처럼 끌기 시작했다. 오두막 안에서는 주먹으로 판자를 두들기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비탈의 절벽까지 오자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놓아버렸다. 오두막은 비탈을 구르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제 무게 대문에 더 속력이 가해지며 살아 있는 것처럼 뛰고 부딪치고 하면서 굴러갔다. 안에서는 무서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움푹 팬 곳에서 한바탕 곡선을 그리며 훌쩍 뛰어오른 그 다음 순간 깊숙한 땅에 여지없이 떨어져 마치 달걀처럼 부서져 버렸다. 끔직한 두 시체가 그 속에 깔려 있었다. 남자의 이마에는 구멍이 뚫리고 얼굴은 형편 없이 깨져서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여자는 턱이 빠져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부러진 손발이 뼈가 없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참사를 폭풍우를 피하려고 뛰어들어 간 오두막이 거센 바람에 뒤집혀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날 밤 잔은 죽은 아이를 낳았다. 계집애였다. 잔은 석 달 동안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몹시 몸이 쇠약하고 조그마한 소리만 들어도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잔에게는 오직 폴이 전부였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되어 아브르의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집 안에는 그래도 평화와 사랑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는 남작도 남작 부인의 동생으로 늙은 독신인 리존도 리페플에 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폴은 세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났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된 시월 어느 날 아침 그는 세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아브르로 출발했다. 그는 생후 처음 가족의 손을 떠나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날 밤 레페플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러나 폴은 이윽고 이틀만에 한 번씩 만나러 오는 어머니가 그다지 반갑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보다도 처음 사귄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측에서도 면회를 금했다. 잔은 하는 수 없이 폴이 돌아올 휴일을 고대하며 살아야 했다. 폴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금발의 아주 훌륭한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낙제를 두 번씩이나 하고 겨우 수사과에 올라 갔을 때는 벌써 스무 살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휴일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오는 습관을 차츰 게을리 하게 되고 어떻게든지 구실을 붙여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아침에는 초라한 옷을 입은 유태인 노인 하나가 잔에게 면회를 청했다. "마님께 보여 드릴 쪽지를 가져 왔습죠" 노인은 대 묻은 쌈지 속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어 잔에게 주었다. 그것은 폴의 사인이 들어 있는 차용 증서였다. 잔은 전신이 떨렸다. 폴은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불량 소년들과 함께 도박장에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즉시 아브르로 향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이미 한 달이나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교장이 잔의 사인이 있는 편지 네 통과 의사의 진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다만 놀랄 따름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읍내 여관에서 자고 이튿날 경찰의 손을 빌려 시중에 숨어 있는 여자한테서 폴을 찾아 냈다. 그들은 이 젊은이를 데리고 레페플로 돌아왔다. 잔은 도중 내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으나 폴은 실로 태연한 낯으로 창밖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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