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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쓸쓸한 당신 3. - 박완서

Joyfule 2010. 5. 20. 10:17
     너무도 쓸쓸한 당신 3. -  박완서    
돈을 못 벌 때는 세 식구가 전적으로 남편 수입에 의지해야 했으므로 
남편 사정을 볼 여유가 없었고, 돈을 넉넉히 벌게 되자 
상대적으로 남편 송금이 하도 쩨쩨해 보여서 또한 남편 걱정을 안 하고 말았다. 
그렇게 역대 정권에 충성을 다하던 남편도 
어찌 된 일인지 정년을 한참 남겨놓고 명예퇴직을 당했다. 
그 소식은, 남편이 근무하던 고장과는 얼토당토않게 
휴전선하고 가까운 시골에다 헌집하고 거기 딸린 약간의 땅을 사놓은 게 있는데, 
거기 가서 살기로 정했단 소리하고 동시에 들었기 때문에 
은퇴 후 같이 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근심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마이크 대고 연설하고싶은 걸 
어떻게 참고 살까 싶어 피식 웃음이 났을 뿐이었다. 
은퇴 후에도 연금은 꼬박꼬박 그녀의 통장으로 입금돼 왔다.
아이들은 가끔 그 시골집에 다니러 가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시라고 위로하고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이들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전원생활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녀에게도 조금만 더 참으란 소리를 자주 해오고 있었다. 
엄마가 저희들 때문에 아빠와 떨어져 사는 걸 늘 미안해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저희들이 결혼 후까지도 부모에게 신경을 쓰거나 책임을 지게 될까봐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할 수도 있으리라. 
엄마 아빠를 붙여놓는 거야말로 상쇄(相殺)시키는 최상의 방법이고, 
그럼으로써 저희들은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은 속셈이 있을지라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일부러 한 번도 남편의 전원생활을 가보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싶었다. 
또 남편이 그녀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 정도로 착실하게 혼자 살 궁리를 해온 걸 보면, 
별거상태를 고정시키고 싶은 건 남편도 그녀와 다름없다고 봐야 한다는 
자존심 대결 같은 것도 있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데 그가 어떻게 살든 뭣하러 아는 척을 하겠는가. 
초가집이 썩고 썩어 주저앉듯 고요한 파탄이었다. 
한지붕 밑에 사는 자식들 귀에도 안 들리는. 
“그 양복밖에 없으시유? 오늘은 딴 양복을 입으시지 않구.” 
그녀는 마직이라 구김이 많이 간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윗도리 깃에는 김칫국물 자국인 듯한 얼룩도 보였다. 
“왜 이 양복이 어때서? 최고급이라면서.” 
“아무리 최고급이라도 그렇죠. 며늘네한테 예단 받은 양복 아니우? 
예단 받은 건 결혼식날 하루 입었으면 됐지 
줄창 입으면 그 집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줄창 입긴 결혼식날 입고 오늘 처음 입었소. 
여름에 넥타이 매는 양복은 누가 억만금을 준대도 줄창은 못 입겠습디다.” 
“사돈 보기에 줄창이란 소리예요. 
결혼식날 보고 오늘이 처음 보는 거 아뉴. 조금 신경을 쓰시지 그랬어요.” 
“예서 어떻게 더 신경을 쓰나? 
채정이년은 며칠 전부터 꼭 정장하고 오라고 전화질이지, 
넥타이 매는 여름 양복은 이거 한 벌밖에 없는 걸 낸들 어떡허란 말요.” 
“아이고 알았어요. 알았으니 그만둡시다.” 
더 길게 말하단 밑천도 못 건질 것 같았다. 
“양복보다 더 중요한 건 사돈 보기에 우리가 
보통 부부 사이로 보이는 걸 거요, 아마.” 
남편은 한결 가라앉은 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서더니 찻값을 내러 나갔다. 
그녀는 남편의 짧은 눈길에서 연민 같은 걸 읽고 당황했다. 
내가 저를 불쌍해하면 했지 왜 저가 나를 불쌍해한담, 아니꼽게스리. 
시계를 보니 졸업식에 대가기 맞춤한 시간이었다. 
후기 졸업식은 졸업생이 적어서 그런지 식장이 야외가 아니고 대강당이었다. 
사돈 내외를 비롯해서 처남, 처형, 동서 등 
처가 쪽 식구가 열 명도 넘게 식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채정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잡아놓으러 미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채정이 덕에 양쪽 사돈이 가장 좋은 자리에 나란히 앉고 
다른 식구들도 흩어지지 않고 모여 앉았다. 
안사돈끼리 가운데 붙어 앉고, 
바깥사돈들은 각각 자기 마누라 옆에 앉게 되었는데 식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채훈이 장모는 그녀의 귓전에다 대고 야죽야죽 잘도 소곤거렸다. 
하긴 한 달 가까이나 사위를 데리고 있었으니 할 얘기도 많을 것이다. 
주로 두 내외가 얼마나 금슬 좋다는 얘긴데 흉보는 것 같으면서도 자랑이요, 
어려웠던 것 같으면서도 재미본 얘기였다. 
“딸자식은 소용없단 소리가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니까요. 
큰딸은 미리 그러려니 하고 길러서 몰랐는데, 
막내는 우리집 양반이 유난히 애지중지하셨거들랑요. 
저도 덩달아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설거지 한 번을 안 시키고 떠받들어 길렀더니, 
글쎄 시집가고 나더니 당장 부엌에 나와 
제 신랑 먹을 거 먼저 챙기느라고 어찌나 법석을 떠는지, 그뿐인 줄 아세요? 
즈이 아버지가 아침마다 드시는 녹즙까지 즈이 신랑은 왜 안 주냐고 따지더니 
아침엔 저보다 먼저 나와서 제 손으로 녹즙을 짜가지고 
이층으로 살짝 올라간다니까요. 
이왕 짜는 길에 즈이 아버지 것도 한 잔 더 만들면 어때서 
글쎄 딱 한 잔 제 신랑 거만 해가지고 가는 걸 보면 나는 얄미워 죽겠는데 
우리집 양반은 속도 없이 뭐라는 줄 아세요? 이제야 철났다고, 기특해하는 거 있죠. 
아무튼 막내사위라면 예뻐서 그저 이래도 허허허, 저래도 허허허, 
입을 못 다무신다니까요. 우리 수정이도 시집 잘 갔지만 
정서방이 장가 하나는 정말 잘 갔어요. 안 그렇습니까?” 
“아무러면요.” 
마지못해 그렇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이 여자가 누구 약을 올리기로 작정을 했나 싶어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신혼의 딸 내외를 꽃본 듯이 얼르면서 옥시글옥시글 즐거워할 
그 집안과 대비되어 떠오르는 것도 자신의 옹색한 살림살이가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남편의 시골집인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외딴집 홀아비 살림의 썰렁함, 스산함 그런 것들이 옛날 영화처럼 구질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사위는 백년손이라는데 어려움이 많으시죠. 
저희 집으로 보내셔도 좋은데…….” 
그녀는 인사성으로 그렇게 말해놓고도 말끝을 흐렸다. 
말끝을 흐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화도 났다. 
안사돈끼리의 이런 미묘한 심리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앉은 남편은 고개를 길게 빼고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졸업식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고, 아니에요. 정서방이 얼마나 소탈하고 붙임성이 좋다고요. 
하긴 저희 집에 드나든지가 어디 일이 년입니까. 
신입생 시절부터 서로 단짝 친구였으니, 
사위 될 줄 모를 적부터 아들처럼 얘, 쟤 이름 부르고 
먹던 밥상에 숟갈 하나 더 놓고 같이 먹고 했으니까, 정이 들 대로 든 걸요 뭐. 
그래도 막상 사위가 되고 나니 어찌나 든든하고 귀여운지, 우리집 양반은 더해요. 
며칠 전에 즈희 시아버님 제사였잖습니까. 
우리 큰애네는 미국 가 있으니까 제사 참예 못 한 지가 오래 됐지만 
작은아들이 엄연히 있는데 글쎄 턱 하니 아들 제쳐놓고 
막내사위 먼저 잔을 올리게 하지 뭡니까. 
조상님한테 새사람을 먼저 인사시켜야 한다나요. 
우리집 양반이 워낙 소탈해서 제사에도 격식이 없어요. 
영정만 모시고 지방도 안 써요. 제수도 격식보다는 생전에 좋아하시던 걸 주로 하죠. 
지방을 안 쓰는 대신 우리집 양반은 마치 살아 있는 어른들한테 하듯이 
자상하게 요새 사는 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잘 봐달라고 조르기도 한다니까요. 
이번에 새사위를 생면시키시면서도 어찌나 웃기시는지 
제사가 엄숙하기는커녕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니까요.” 
안사돈은 지금 생각해도 다시 한 번 즐겁다는 듯이 호호거렸다. 
새사람이라니, 아무리 세상이 두서없이 바뀌었다고 해도 
수정이가 우리집 새사람이 되면 됐지 왜 우리 채훈이가 자기 집 새사람이란 말인가. 
격식을 안 차리기로는 이쪽이 사돈집보다 한술 더 뜨는 집안이었다. 
그녀가 시댁 제사에 참예해본 지가 언젯적인지도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