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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쓸쓸한 당신 4. - 박완서

Joyfule 2010. 5. 22. 15:14
     너무도 쓸쓸한 당신 4. -  박완서    
남편이 지차고 큰댁이 외진 산골이라 새댁 적 빼고는 남편 혼자 다녀오곤 했다. 
남편도 다음날 아이들 가르치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으면 돈만 부치고 안 가기도 했고, 
그 버릇은 그런 신경 안 써도 되는 교장이 된 후까지도 계속됐다. 
제사에 채훈이를 데리고 가본 것도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제사는 자기가 보고 기억하는 조상에 한해서만 지내면 된다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었다. 
채훈이도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제사를 그닥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제 처를 제 조상 제사에 참예시키기도 전에 
제가 먼저 처가 제사에서 꾸벅꾸벅 절을 했을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영 고약했다. 
아유, 못난 녀석, 더리쩍은 자식……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게 분했다. 
그녀는 야죽거리는 안사돈에 대한 적의를, 
스스로 아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증폭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장 졸업식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남편의 손을 잡았다. 
손잡고 나갈 사람이 필요했다. 
남편은 손을 잡힌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단상에서 진행되는 일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마치 이제나저제나 자기가 상 받으러 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모범생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거둬들이고 말았다. 
남편에게 단상이란 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단상을 좋아했다. 
단상에만 올라가면 저절로 목소리에 권위적인 억양이 붙고, 
아무도 흠잡을 수 없는 지당한 소리만 줄줄이 나왔다. 
아무리 조그만 집단에서도 단상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는 단상에 있을 때, 단하에 있는 단 한사람이라도 
자기를 주목하지 않는 걸 참지 못했다. 주목만이 아니었다. 
그가 단상에서 단하에 요구한 것은 경배였을 것이다. 
단상에 있을 때 단상의 권위에 충실했던 것처럼 
단하에서는 단하의 의무에 충실코자 하는 걸 누가 말리랴. 
그런 그가 집안식구에 대해서는 전혀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던 것은 
자상하거나 가족적이어서라기보다는 월급봉투만 축내지 않으면 
가장의 권위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별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심없이 받아들인 후에도 그렇고, 
은퇴 후까지도 월급이나 연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금 축내고 
전액 식구들한테로 가게 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의 집념에 가까웠다. 
요새는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뭐해 먹고 사는 것일까? 
그녀는 조금 전에 잡았던 남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톱밑에 때가 낀 투박한 손이었다. 
그녀는 직접 잡아보았을 적에도 못 느낀 이물감에 허방을 밟은 것처럼 움찔했다. 
박사, 석사 학위 수여식이 끝나고 학사 학위를 수여할 차례였다. 
그녀는 아들이 학위받는 걸 똑똑히 봐두고 싶었다. 
사진은 채정이가 찍기로 돼 있었다. 
채정이뿐 아니라 그쪽 식구들 중에서도 서너 명이나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것 같았다. 
졸업생보다도 더 많은 사진사들이 무대를 가려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사돈이 다시 조근조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내의 웅성거림 때문인지 귓불에 숨결이 닿을 듯 안사돈의 속삭임은 친근했다. 
“보려고 애쓰지 마세요. 사진이나 잘 나오면 됐죠, 뭐. 
무슨 행사든지 사진밖에 남는 게 뭐 있나요. 참, 아이들 결혼사진 잘 나왔죠? 
사진사가 찍은 것말고도 카메라 사진까지 다 챙겨서 보내드렸는데.” 
“예, 잘 받았습니다. 카메라 사진은 저희들한테도 꽤 있는데,
 웬걸 그렇게 많이 꼼꼼하게 정리를 해서 보내셨어요?” 
“저희는 아이들 자라는 모습뿐 아니라 
걔들한테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진으로 남겨놓는 게 큰 낙이랍니다. 
취미도 되고요. 상이나 임명장 받는 사진도 안 빠트렸는데 혼인이야 인륜지대산걸요. 
이렇게 꼭 기록을 남기다 보니, 
기록 때문에라도 할 건 다 하고 살아야지 대충 넘어가면 안 되겠더라고요. 
사진첩을 정리하다 보니 신혼여행 못 보낸 게 그렇게 서운하더라고요.” 
“못 보내다니요, 저희가 안 가겠다고 해서 우겨서 그렇게 된 게 아니던가요?” 
그녀는 계속해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색을 하고 따졌다. 
결혼식을 마침 바캉스 시즌에 치렀을 뿐 아니라, 
유학 갈 날을 한 달 남짓 남겨놓은 시점이라 
채훈이는 채훈이대로 수정이는 수정이대로 각각 일이 많았다. 
비자도 새로 내야 하고, 짐도 배로 미리 부쳐야 하고, 운전면허도 갱신해야 하고, 
이런저런 해결 안 된 일 때문에 마음들이 한갓지지 않아 
신혼여행은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며칠 쉬다 가는 걸로 대신하겠다고 
저희끼리 합의하고 양쪽 부모는 통고만 받았는데 지금 와서 웬 트집인가 싶었다. 
“그러문요, 그러문요. 그래도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니더라구요. 
더군다나 양가가 다 언제 또 해볼 것도 아닌 마지막 자식 경사가 아닙니까. 
남 하는대로 다 해주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말인데요, 
졸업식 끝나는 대로 제주도로 삼박 사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도록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아직 걔네들은 모르고 있어요. 놀래켜주려구요. 
까다로운 절차도 다 끝나고 모처럼 여유가 생겼으니 좋아할 거예요. 
여행 다녀오자마자 다시 비행기 타야 하는 게 안됐지만 
사나흘이라도 할일없이 서울에서 빈둥대면 뭘 합니까? 
술친구한테 끌려나가기나 십상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겠군요.” 
그녀는 자신 속의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걸 위태롭게 느끼면서 쓰겁게 대답했다. 
안사돈은 무슨 요량인지 핸드백에서 
흰 봉투에 든 걸 꺼내서 그 내용물을 살짝 보여주었다. 
왕복 항공권과 하야트 호텔을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이었다. 
보여주고 나서 그걸 가볍게 그녀의 무릎 위에다 놓아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이따가 사부인께서 아이들한테 주세요.” 
“왜요?” 
그녀는 당장 귀밑이 닳아오르게 놀라면서 물었다. 
“아, 아무나 주면 어떻습니까? 거기다 명토를 박아놓은 것도 아니고, 
사부인께서 주시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거예요. 
저희 쪽에선 따로 여비나 쥐여주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더할 나위없이 상냥하면서도 속셈을 드러내지 않는 이 여자의 진의는 뭘까? 
잘못한 것도 없이 사람을 남루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안사돈의 수법에 
그녀는 걸려 넘어진 것처럼 무참해지고 말았다. 
혼란스러워 허둥대는 손길로 무릎 위의 봉투를 사돈 쪽으로 거칠게 밀어놓았다. 
그러나 미처 어째 볼 틈도 없이 그 하얀 봉투는 
이번에는 그녀 핸드백의 사이드 포켓 속에 꽂혔다. 
민첩하고도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스스로도 분간 못 할 감정이 모닥불처럼 그녀의 표정을 달구었다. 
하필 그때 졸업식이 끝나고 하객들은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우르르 몰리기 시작했다. 
안 넘어지려고 버팅기면서, 정신없이 사람들한테 밀리면서, 밖으로 나오니 
오후의 열기가 지글지글한 엿물처럼 엉겨붙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지겹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연발했다. 
녹아내리듯이 조금씩 흐느적대는 인파 속에서 
남편도, 채정이 내외도, 사돈집 식구들도 찾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되는 대로 인파에 밀려난 자리엔 한 뼘 그늘도 없어서 
그녀는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자포자기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제일 먼저 그녀를 찾아준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저만치 큰 느티나무 아래 모여 있는 하객들을 가리키며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큰 소리로 나무라기부터 했다. 
그녀는 남편을 보자마자 아직도 검정 핸드백에, 
웨이터 주머니에 꽂힌 풀먹인 손수건처럼 삼각형으로 빳빳하게 꽂힌 
봉투가 갑자기 생각나 얼른 안으로 보이지 않게 밀어넣었다. 
남편을 따라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거기 다 모여 있었다. 
채정이 내외만 겨우 아는 척을 하고 딴 사람들은 
채훈이를 둘러싸고 번갈아가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