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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쓸쓸한 당신 5. - 박완서

Joyfule 2010. 5. 23. 23:41
     너무도 쓸쓸한 당신 5. -  박완서    
채훈이는 꽃다발과 선물 꾸러미에 묻히다시피해서 바보처럼 싱글거리고 있었다. 
식장에서 바깥사돈이 포장을 요란하게 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는 걸 보고,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집에서 주면 됐지 뭣하러 식장까지 가지고 왔나 
다소 아니꼽게 여겼었는데, 다른 친척들도 다들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자식한테도 빈손을 부끄러워해야 되냐? 
아무리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해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아까 건네준 흰 봉투는 아무것도 준비 안 한 
우리들의 빈손에 대한 일종의 야유나 동정이 아니었을까. 
아들은 그들하고 단체로 또는 삼삼오오 끼리끼리 사진도 찍고 
인사치레도 하느라 아직도 정신이 없고, 
이쪽의 찍사를 자처하고 나선 채정이까지도 
그 사진 찍기 좋아하는 족속한테는 손을 들었는지 
중심에서 밀려나 관망을 하고 있었다. 
채정이 졸업식 때도 그랬다. 
상견례를 겸한 최초의 만남이었는데도 이쪽은 제쳐놓고 
저희끼리 채정이를 끼고 돌면서 사진도 찍고, 요리 보고 조리 보면서 
귀여움도 표시하고 넌지시 위엄도 보이느라 이쪽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그래도 그땐 별로 분한 줄을 몰랐다. 
딸 쪽이니까 으레 그러려니 했고, 그 밑에 아들이 있으니 
아들 가진 쪽은 어떻게 세도를 부려야 되는지를 보고 배울 기회다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를테면 마음만 먹으면 몇 곱으로 갚을 수도 있는 
복수의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닥 굴욕스럽지 않았다. 
또 재학중에 애인이 생겨 졸업식에 벌써 시집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걸 
부러워하는 눈길을 의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랬건만 이게 무슨 꼴이람. 누구누구 나무라 무엇하랴, 
내 아들이 저 꼴이니. 그녀는 강력한 권리 주장처럼 눈을 부릅뜨고 아들을 주시했다. 
채훈이가 마침내 엄마의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들의 눈길을 그녀는 잽싸게 낚아챘다. 
마치 잡아 끌리듯이 채훈이는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약간 계면쩍은 듯이 웃는 채훈이는 아무리 내 아들이라도 바보 같았다. 
아들은 엄마를 버려둔 걸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얼른 학사모를 벗어서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주려고 했다. 
채정이도 이제야 자기가 나설 차례가 왔다는 듯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러나 그녀는 온몸으로 강력하게 반발하며 학사모에서 벗어났다. 
엄마를 뭘로 보니? 그러나 그런 말이 미처 나오기 전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임자, 좋으면 좋다고 그럴 것이지, 괜시리 암상은 부리고 그래, 
이 좋은 날. 훈아, 느이 엄만 싫단다. 나나 좀 써보자. 
그 뭐시다냐, 학사몬가 뭣인가…….” 
머쓱해 있던 채훈이가 구원받은 듯 아버지 머리 위에 
학사모를 올려놔주고 정답게 팔짱을 꼈다. 
채정이뿐 아니라 사돈네 식구 중 카메라 가진 이는 몽땅 무슨 살판이나 난 것처럼 
일제히 효자 아들과 장한 아버지를 겨냥해 초점을 맞추었다. 
졸지에 남편은 스타가 되었다. 
남편은 마치 소 팔고 땅 팔아 대학 졸업시킨 70년대 농사꾼처럼 
멍청하고도 순진하게 사진을 찍히고 또 찍혔다. 
저렇게 좋아하시는 걸 보니, 정서방이 하루빨리 미국서 석사도 따고 박사도 따서 
아버님을 초청해야 한다는 덕담도 흐드러졌다. 
다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고 시간은 야비다리를 피우며 흘러갔다. 
누군가가, 연못가도 좋고, 민주학생 기념탑이 있는 노천극장 주변은 또 얼마나 좋은데 
주변머리도 없지, 여기가 뭐가 좋아서 꼼짝을 못 하고 
같은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또 찍느냐고, 그들의 사진찍기에 제동을 걸었다. 
그 말에 아무도 이의가 없었던지 대식구가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있는 경치 좋은 곳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자연히 그 집 식구는 그 집 식구끼리, 이 집 식구는 이 집 식구끼리 어울려서 걷고, 
채훈이는 양쪽 눈치를 다 보느라 엄마 곁에 붙었다가 
장모 곁에 붙었다가 하느라고 요령껏 걸음을 조절하고 있었다. 
북새통이 더 심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양가 식구들은 서로 놓칠 뻔하다가도 
채훈이가 이어줘서 서로 못 찾는 불상사는 안 일어났다. 
장모 곁에서 뭐라고 정답게 소곤거리던 채훈이가 어느 틈에 그녀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낄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알랑거리는 버릇을 어디서 배웠을까 
징그러워서 눈을 보얗게 흘겨주며 뿌리치곤 했다. 
노천극장에서는 마침 재학생들이 
마당놀이 연습을 하고 있어서 기념탑 근처는 인산인해였다. 
슬쩍 자리를 피하기에는 알맞은 장소다 싶었다. 
안사돈은 아마 그 동안에 봉투가 자리를 옮긴 줄 알 것이다. 
그 동안에 그럴 수 있는 기회도 시간도 충분했으니까. 
그녀도 줄창 핸드백 바깥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봉투를 의식 안 한 건 아니었다. 
의식 안 할 도리가 없었다. 
그건 줄창 내복에 달라붙은 가시처럼 그녀의 의식을 편안치 못하게 했으니까. 
그녀는 사돈네 식구들과 채훈이가 함께 보이지 않는 틈을 타 
남편의 소매를 힘차게 잡아 끌었다. 
돌연 떠오른 생각이 결정적 기회와 맞물렸다.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자신의 생뚱한 생각에 놀라서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고 다리가 후들댔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한 걸 알자 돈을 갖고 튀는 악당 같은 스릴과 쾌감으로 
온몸이 파열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그건 쾌감이 아니라 살(煞)인지도 몰랐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살처럼 뻗치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남을 해코지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어찌나 좋은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어금니를 물었다. 
남편은 끌려오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꾸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화장실이라도 찾는 줄 아는지 남편은 순순히 따라왔다. 
교문이 보이는 데까지 와서야 그녀는 헛된 흥분을 가라앉히고 덤덤히 말했다.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려고 그랬어요. 
처가에서 채훈이 내외를 오늘 제주도로 여행을 보낸다는군요. 
졸업축하 겸 신혼여행 겸이라나요. 
우리가 있으면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길게 인사해야 하고,
 떠나보낸 후엔 양가가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헤어져야 할 것처럼 미적거려야 하고, 
아직 서로 친하지도 않은데 그럴 거 뭐 있어요.” 
“그래, 참 사돈댁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구먼. 
그래도 그렇지 잠깐이라도 인사를 하고 오는 게 도리지, 
우리가 길 잃어버린 줄 알고 찾으면 어떡하라고.” 
“걱정 말아요. 아까부터 내가 눈치줬으니까 채훈이는 아마 짐작했을 거예요. 
적당히 둘러대겠죠, 뭐.” 
“우리가 용돈이라도 줘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소만…….” 
남편의 나중 말엔 다소 빈정거리는 투가 섞여 있었다. 
어차피 손발이 맞아서 저지른 일도 아니건만 그녀는 울컥 야속했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의 즐거움을 잠시 훼방놓거나 하루쯤 유예하는 데 불과한 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소모한 좀전의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으로부터도 밀려난 것 같은 느낌은 
여지껏 겪어본 어떤 외로움하고도 닮지 않은 이상한 외로움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지만 하는 데까지 해볼 작정이었다. 
몸을 달구던 정열은 환각처럼 온데간데없었지만 
훼방놓고 싶은 심술은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우리끼리지만 저녁이라도 먹고 헤어집시다.” 
남편의 제안은 전혀 은근하지 않고 사무적이었다. 
“이렇게 해가 높다란데요?” 
살핏한 해는 어쩌자고 아직도 지칠 줄 모르고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입추 처서 다 지났다고는 믿기 어려운 더위였다. 
“그래도 한끼 때우고 들어가는 게 안 낫겠소. 
혼자 밥 해먹는 게 얼마나 을씨년스럽다고…….” 
어쩌자고 이 남자는 이렇게 정직한 걸까. 
그녀는 남편의 촌스러움, 초라함, 변변치 못함이 다 겉에다 주렁주렁 달고 있는 
혼자서 밥 해먹은 티만 같이 여겨져 바로 보기가 싫었다. 
“오늘은 당신 따라서 바라니나 한번 가볼래요.
왜 그렇게 놀라요? 내가 어디 못 갈 데 가본다고 했어요?” 
바라니란 남편이 자리잡은 동네 이름이었다. 
채정이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채정이는 동네 이름이 참 예쁘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기분이 안 좋았었다. 
행여나 누가 찾아오나 고개를 길게 빼고 
동구밖만 바라보고 있는 늙은이들 모습이 떠올라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