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사랑의 빚은 행복한 채무이다(롬13:8-10)

Joyfule 2024. 4. 30. 12:44

 

 

사랑의 빚은 행복한 채무이다(롬13:8-10)

 

 사랑하므로 행복하노라 하는 시의 구절도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고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인간은 그럴 의무가 있나 보다 생각했죠.

그러다가 언제부터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전에서 말씀 한 구절씩 붙잡고 QT를 한다고 씨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한 영이 된 그 계명을 꼭 붙잡고 지키므로 아버지의

사랑이 임하고 주의 영과 생명이 내 속에 나타나므로 주님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함이나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이제 겨우 아버지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루틴(routine)을 터득한 겁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벗어나 주 안에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진리를 알고 거룩하게 되어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다가 배운 겁니다.

 

Q. 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는가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A.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온전한 사랑으로 하든지 완전한 율법으로

하든지 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행함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에게든지 즉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 부담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은 이미 각색이 되고 말 겁니다.

꽃 한 송이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듯 사랑을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 배우자 형제 친구 이웃 등에게 잘해야 한다는 의무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잘 해 줘야 한다고 맹세하고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줄 게 사랑 밖에 없기 때문에 모조리 쏟아 붓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지요.

 

바울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롬1:14)

의무의 빚에 눌려 압박을 받는 빚쟁이가 아니라 로마를 향해 담대하게 외치는

사랑의 부채 덩어리였습니다. 그 사랑의 채무로 인해 복음이 세계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의무는 빚입니다. 의무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빚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은 의무로 갚아가는 채무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빛으로, 그 빛이 생명으로, 그 생명이 사랑으로

진화하는 가운데서 얻는 기쁨을 동반하는 자원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 달란트가 되면 주님을 위해 주린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벗은 자들을 입히고 병든 자를 돌보고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일인 것처럼 해 치우고 맙니다.

주님께서 나중에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헐 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하니 의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하고 반문을 합니다. 자신들은 마땅히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겨서 한 일이었습니다.

달란트는 무한한 가치이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소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언제 그러한 곤경에 처했는지 묻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한 의무로 항상 준비하고 있었는데 왜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바로 오른 편과 왼 편 곧 의인과 악인의 분별 기준입니다(마25:31-36)

의인은 그리스도가 사랑화 되어 마땅히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지만

악인들은 사랑할 의무와 보상심리를 가지고 잔뜩 벼르다가 끝내 심판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이 된 자로 육신을 좇아 살

의무가 하나도 없어진 채로 성령을 좇아 영으로 생각하고 살므로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러는 진리의 지식을 터득해야죠.

그로 인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종의 영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아들의 영을 지니고 밖으로 사랑의 에너지를 뻗치므로 사랑에 따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사랑의 빚은 매우 행복한 빚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자체가 행복이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십계명의 전반부가 이루어지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니 십계명의 후반부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시민의

절대윤리인 산상수훈의 마5장은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6장은 자신의 의와

생활의 염려에서 자유 그리고 7장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이룹니다.

요한복음 14-16장의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서서히 이루어져 가는 걸 봅니다.

사랑하는 이에겐 보상이나 채권의식이 없습니다. 오직 더 사랑해 주지 못한 부채만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은 그 자체가 행복한 부채의식이라고 말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