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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영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2.

Joyfule 2014. 9. 21. 08:18
 
인생은 영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2.

그러므로 신앙의 초기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훈련과 굴복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십자가의 보혈을 경험하지만 
애굽에 있는 신자들은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가서 비로소 말씀을 받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말씀을 배우며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말씀의 중심이 그리스도이며 피이며 
그리스도의 피에 새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알게 됩니다. 
시내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광야는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자세히 쓰자면 이 부분도 한권의 책이 필요하겠지만, 
이 광야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말씀, 율법의 말씀을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광야의 말씀, 이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 
모든 자아가 광야에서 다 엎드러지기까지 역사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란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어야 내 안에서 예수가 사시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열매의 비결이며 믿음의 비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큐티를 하고, 나름대로 적용을 하고.. 그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중심, 말씀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분적으로 좋고, 좋아하고, 그런 말씀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중심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은 죽이는 것입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역할은 몽학선생입니다. 
아, 나는 안 되는 구나.. 나는 끝이구나.. 이렇게 절망시키고 낙담을 일으키고 
그리스도 아래 엎드러지게 하는 것이 말씀의 역할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거룩하라, 순종하라, 순결하라.. 그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하다보니 
내가 더럽고 순종은 커녕 욱하는 성질이 있고 못됐고.. 
그러한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7장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절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7장의 절망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면 로마서8장의 영광을 맛볼 수 없습니다.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고 생명의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 후에 부활이 있는 것처럼, 
로마서7장의 처절한 절망을 충분히 통과한 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했다]는 환희의 감격이 터지게 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먼저 죄와 사망의 법으로 죽은 이들이 경험하는 것이지 
아직 자기의 처절한 사망성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생명 이전에 먼저 죽음이 있습니다. 
그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 말씀의 능력이며 광야의 훈련입니다.  
광야란 바로 이 로마서 7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나는 안 되는 구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구나.. 
그렇게 절망을 경험시키는 훈련과 연단의 시기입니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구나.. 내 안에는 오직 이기심과 사악한 자아와 사망 뿐이구나. 
이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경험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주님은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란한 상상을 하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범죄하면 빼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문자적으로 순종해서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버린 분은 안 계시겠지요? 
그것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자아가 해야할 것은 죽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게 되므로 율법의 의를 이루고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승리의 삶의 비결, 열매를 맺는 비결은 
오직 육과 자아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정죄하고 죽이려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폐부까지 완전히 썩어서 문드러진 우리 자신을 보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니까 너희 힘으로 살지 말고 
나를 믿고 나를 부르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라.. 
그렇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직 자신이 고상한 사람인줄 아는 사람은 아직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 자존심이 있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줄 아는 사람은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니까 
자기를 높이고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으며 억울해하면서 삽니다.
아직도 자기 속에 가득한 사망을 모르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삽니다. 
심지어 자기 신앙이 최고라고 여기며 남들이 한심하다고 판단하면서 삽니다. 
그런 이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자기의 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자기 힘으로 노력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모르면 자꾸 자기가 행하려 하고 노력을 하게 되며 
자기 의가 나와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고 모든 의와 열매와 생명이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를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흉악한 죄인 쓰레기인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만을 한 없이 높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기만을 원하며 자신을 치는 이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이들에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학벌이나 용모나 환경 등으로 인하여 
우월감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가지거나 합니다. 
세상 사람이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자도 그러한 상태라면 그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아직도 영의 세계를 모르고 세상에 매어있고 
자아에 매여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그의 학벌이나 용모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살리는 것은 그 학벌이나 용모나 어떤 조건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의를 행하려고 죄를 끊으려고 아무리 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됩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자기 죽음을 경험하고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살게 될수록 우리는 변화의 열매를 갖게 됩니다. 
죄를 이기려고 온갖 애를 썼을 때는 할 수 없었던 것이 우리 안에서 
새 역사를 이루시는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게 되고 승리의 풍성한 변화와 열매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란 죽음의 분량만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죽음이 이루어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육이 죽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 죽음이 이루어져서 드디어 가나안의 입성, 
정복의 역사와 풍성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아직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애정을 버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천국에 방해가 되는 줄을 전혀 모릅니다. 
이들은 혈연에 대한, 자기 혼의 애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버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왜 잘못인지를 모릅니다. 
죽은 육체를 따라 살때 죽음이 오며 산 영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삶이 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왜 요셉이 없어져야 했는지, 베냐민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지, 
왜 이삭을 버려야 하는지, 왜 라헬은 빨리 죽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자존심을 세워달라고, 
자기 소원과 욕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며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장가들었으니 바쁘고, 소를 샀으니 가봐야 하고 
주를 따르겠지만 장사를 한 후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날 때 그는 비로소 꿈의 허망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를 갈망하지 않은 삶, 주를 향하지 않은 내 멋대로의 삶은 곧 죽은 삶이며 
허망한 삶이며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삶인 것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육신적이고 혼적인 것들이 처리되는 장소이며 기간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에게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광야의 기간 동안 처리되어 영의 새생명이 일어나도록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무 잎의 아름다움과 풍성함들이 다 죽어 떨어지고 주위 환경도 얼어붙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 봄이 되고 새생명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