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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5.

Joyfule 2010. 5. 17. 06:32
 
  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5.  
내가 K를 휩쓸어간 해안을 다시 찾은 것은 작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지난해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형이 재산 처분을 위해 고향집을 매각했는데, 
광을 정리하면서 나의 어릴 적 물건들을 내게 보내주었습니다. 
대부분 잡동사니였는데, 그 중에 K가 내게 그려준 그림이 한 묶음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념으로 남겨둔 것이겠죠. 
나는 두려움에 숨이 막힐 듯 하였습니다. 
K의 혼이 그림 속에서 내 눈앞에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장 처분할 생각으로 나는 그것을 
원래대로 얇은 종이에 싸서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K의 그림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고민한 끝에 종이를 풀고
 K가 그린 수채화를 굳은 마음으로 꺼내 보았습니다. 
풍경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눈에 익은 바다와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과 동네가, 
K다운 특징이 있는 선명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신기하게 색도 바래지 않아 
옛날에 보았던 인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을 들고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나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그림들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고 예술적으로도 우수하였습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일처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림을 보면서 K와 함께 놀았던 기억이며 
함께 찾았던 장소들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소년시절 내 자신의 눈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절 나는 K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똑같이 맑고 깨끗한 눈으로 세계를 보았던 것이죠. 
나는 회사에서 돌아오면 매일 책상 앞에 앉아
 K의 그림을 손에 들고 들여다보았습니다.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내 의식이 오래도록 강경하게 거부해온 
소년 시절의 아련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K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 몸 속으로 
무언가가 살며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일주일쯤 지났을 때일까요, 나는 퍼뜩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혹시 내가 지금까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저 파도 끝에 누워 있던 K가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 한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닐까. 
그의 진심은 혹 다르지 않았을까. 
히죽 웃은 것처럼 보인 것은 단순히 그렇게 보인 것일 뿐. 
그는 그때 의식도 아무것도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K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영원한 작별을 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K의 표정에서 읽었던 처절한 증오의 색은 
그 순간 나를 사로잡고 지배한 깊은 공포의 투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K가 그린 옛 수채화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의 그런 생각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K의 그림에서는 
티없이 맑고 온화한 영혼밖에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랜 시간 꼼짝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해가 기울고, 침묵의 밤이 왔습니다. 
밤이 끝없이 계속 되고 다시 날이 밝았습니다. 
새로운 태양이 하늘을 연분홍으로 물들이고 
새들이 새 아침을 노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지금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간단히 짐을 꾸리고 회사에 결근한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고향 동네는 이미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적한 바닷가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근교에 공업 도시가 들어서는 바람에 
주변 풍경이 크게 변모해 있었습니다. 
역 앞에는 상점이 즐비하고, 영화관이 있던 자리도 
큰 슈퍼마켓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 집도 없었습니다.
K가 살던 집도 없었습니다. 
그 주변은 주차장이었고 승용차와 밴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에도 나는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오랜 옛날부터 이미 나의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해안으로 가서 계단을 걸어 방파제 위로 올라갔습니다. 
방파제 너머로는 이전과 다름없는,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드넓은 바다였습니다. 
멀리로 한 줄기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해변 풍경도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오후 네시가 지나자 저녁으로 기우는 부드러운 햇살이 사방을 감쌌고, 
태양은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거처럼 천천히 서편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가방을 옆에 놓고, 
그런 풍경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온화하고 평온한 풍경이었습니다. 
먼 옛날 거기에 그렇게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쳤고, 
그 높은 파도가 나의 둘도 없는 친구를 
삼키고 말았다는 일 따윈 거짓말 같았습니다. 
그 풍경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를 기억하는 사람도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머릿속의 환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앞의 어둠은 이미 소멸하고 없었습니다. 
그것은 찾아왔을 때처럼 어딘론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지를 걷어올리지도 않은 채 
바닷물 속으로 조용히 발을 내디뎠습니다. 
구두를 신은 채 밀려오는 파도에 두 다리를 맡겨 보았습니다. 
어릴 적 밀려 왔던 파도가 화해라도 하듯 
정겹게 내 다리를 때리고 내 옷과 구두를 검게 적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럼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이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솜을 뜯어 놓은 듯 자그마한 회색 구름이 하늘에 듬성듬성 떠 있었습니다. 
바람도 잔잔하여, 그 구름들은 한자리에 가만히 머물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뭐라고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 구름들은 나 하나만을 위하여 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 태풍의 커다란 눈을 찾느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시간의 축이 삐걱삐걱 커다란 소리를 내었습니다. 
40년이란 세월이, 내 안에서 썩어 빠진 집처럼 무너져 내리고, 
낡은 시간과 새로운 시간이 소용돌이 속에 뒤섞였습니다. 
사방에서 소리가 사라지고, 빛이 휘청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나의 목구멍 속에서 쿵쿵 울리고, 손발의 감각이 몽롱해졌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그 꼴로 거기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일어날 수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나는 더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지난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무서운 꿈을 꾸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밤중에 눈을 뜨는 일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사 너무 늦었다 해도, 
나는 자신이 마침내 구언 받고 회복되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심연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인생을 끝마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일곱번째 남자는 잠시, 
아무 말없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몸을 뒤트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일곱번째 남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도 완전히 멎었는지,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말을 찾듯, 셔츠깃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포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잠시 짬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공포는 물론 존재합니다. ......
그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고, 
때로는 우리 존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공포에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내 경우에- 그것은 파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