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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3.

Joyfule 2010. 5. 14. 11:01
 
  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3.  
그런데 K는 아직 얼굴을 들지 않습니다. 
몸을 구부리고 꼼짝하지 않은 채 발치에 있는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일에 의식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K한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죠. 
어째서 땅울림처럼 그렇게 엄청난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는지.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나 혼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그 소리는 
나한테만 들리는 특수한 형태의 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옆에 있는 강아지도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개들이란 아시다시피 소리에는 매우 민감한 동물이니까요. 
나는 당황하여 K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그를 붙잡아 그곳에서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방법밖에 없었으니까요. 
파도가 다시 밀려오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K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두 발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파제를 향하여 혼자 도망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 끔찍스럽기까지 한 공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포가 나의 목소리를 빼앗고, 
내 다리를 제멋대로 조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드러운 개펄을 구르듯 달려 방파제에 도착하자, 
거기서 K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위험해. 파도가 오고 있어." 
이번에는 내 입에서 소리가 나왔습니다. 
우우우웅 하던 굉음은 어니 사인가 잦아 있었습니다. 
K가 간신히 내 외침 소리를 듣고 얼굴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산더미 같은 파도가 
뱀처럼 높이 고개를 쳐들고 해안을 덮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파도를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높이는 족히 3층짜리 빌딩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파도가 거의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적어도 나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는 소리 없이 다가왔습니다),
K의 등뒤에 있는 하늘을 제압하듯 솟구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K는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그는 파도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는 무자비한 기관차에 
정면으로 충돌한 꼴이었습니다. 
파도는 굉음을 일으키고 부서지면서 모래사장을 
격렬하게 매질하고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 올라, 
공중을 날듯 내가 있는 방파제로 덮쳤습니다. 
하지만 나는 방파제 뒤에 숨어 그 난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방파제를 넘어온 물방울 끝이 옷을 적셨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나는 서둘러 방파제 위로 올라가 해안을 살폈습니다. 
파도는 방향을 바꾸어 거친 아우성을 남기고 
전속력으로 다시 저 먼바다로 밀려나가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마치 땅 끝에서 누군가 거대한 카펫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뚫어져라 바다를 살펴보았지만 K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강아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닷물이 다 말라 해저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파도는 단숨에 저 먼 곳까지 물러갔습니다. 
나는 방파제 위에 혼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정적이 돌아왔습니다. 
억지로 소리를 쥐어 뜯어낸 듯한 절망적인 정적이었습니다. 
파도는 K를 삼킨 채 어딘가 멀리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해변으로 내려가 볼까 하고도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K는 해변 어느 모래 속에 파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바꾸고 방파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큰 파도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밀려오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얼마나 시간이 경과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10초나 20초, 고작 그 정도였겠죠.
아무튼 그 불길한 공백 뒤에,
내가 예측했던 대로 파도는 해안으로 다시 밀려왔습니다.
굉음이 또 지면을 격렬하게 뒤흔들고, 그 소리가 사라지자 
마침내 파도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아까워 똑같이. 파도는 하늘을 제압하고 
치명적인 암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파도가 덮쳐오는 광경을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K를 잃은 지금 도망쳐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 
그저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파도는, 맨 처음 파도에 버금가는 큰 파도였습니다. 
아니 한층 더 큰 파도였습니다. 
천천히 몸을 뒤틀면서 파도는 마치 
벽돌로 쌓은 성벽이 무너져내리듯 내 머리 위를 덮쳤습니다. 
너무도 어마어마하여 현실 속의 파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저 먼 또 하나의 세계에서 찾아온, 파도 모양을 한 무언가 다른 것처럼,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암흑이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눈을 감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나의 심장이 뛰는 고동 소리를 바로 귓전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도는 바로 내 코앞에 와서는 힘이 다했다는 듯 
갑자기 기운을 잃고는 공중에 뜬 채 뚝 정지하였습니다. 
비록 한 순간의 일이었지만 파도는 
무너져 내리던 모습 그대로 거기에 뚝 정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파도의 머릿속에서, 
그 투명하고 잔인한 혓바닥 속에서, K의 모습을 또렷하게 보았던 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내 말을 믿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 자신도 지금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설명드릴 수도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환상도 착각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그 파도의 끝부분에 마치 투명한 캡슐에 갇혀 있는 것처럼, 
K의 몸이 둥실 옆으로 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K는 나를 향하여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눈앞에서, 방금 전 파도에 삼켜진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사로운 웃음이 아닙니다. 
K의 입은 말 그대로 귀까지 찢어질 만큼, 크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싸늘하게 얼어붙은 한 쌍의 눈길이 빤히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습니다.
마치 내 손을 잡고 그쪽 세계로 끌고 가려는듯.
그러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그의 손은 나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한번 K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습니다. 
그쯤에서 나는 정신을 잃은 모양입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버지의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자, 간호사는 아버지를 부르러 갔고, 아버지는 곧장 달려왔습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보고 맥을 짚어 보고 동공을 들여다보고,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었습니다. 
나는 손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도무지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타오르듯 뜨겁고, 머리는 멍하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