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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 - 박지원 3.

Joyfule 2010. 4. 13. 08:12

  허생전 - 박지원 3.  
변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남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초가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할미가 우물 터에서 빨래하는 것을 보고 변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초가가 누구의 집이오?”
“허 생원 댁입지오. 가난한 형편에 글공부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제사를 지냅지요.”
변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 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양식이나 떨어지지 않고 옷이나 입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변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변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집에 
양식이나 옷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많이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하였고, 
혹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셨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 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변씨가 5년 동안에 어떻게 
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해서,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지요. 
무릇, 천냥은 적은 돈이라 한 가지 물종(物種)을 독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열로 쪼개면 백 냥이 열이라, 또한 열 가지 물건을 살 수 있겠지요. 
단위가 작으면 굴리기가 쉬운 까닭에, 
한 물건에서 실패를 보더라도 
다른 아홉 가지의 물건에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이(利)를 취하는 방법으로 조그만 장사치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만 냥을 가지면 족히 한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레면 수레 전부, 배면 배를 전부, 한 고을이면 한 고을을 전부, 
마치 총총한 그물로 흝어 내듯 할 수 있지요.  
뭍에서 나는 만가지 중에 한 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하고, 
물에서 나는 만가지 중에 한 가지를 독점하고
의원의 만 가지 약재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면, 
한 가지 물종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될 것이매, 
이는 백성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만냥을 꾸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만 냥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백만 냥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해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 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지키는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만 냥을 빌린 다음에는 그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변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사대부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같은 분은 
적국(敵國)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었건만 베잠방이로 늙어 죽었고, 
반계 거사(磻溪居士) 유형원(柳馨遠) 같은 분은 
군량(軍糧)을 조달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저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구왕(九王)의 머리를 살 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대문이었지요.”
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변씨는 본래 이완(李浣) 이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어영 대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위항(委巷)이나 
여염(閭閻)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은 그분과 상종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