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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9.

Joyfule 2008. 10. 14. 03:19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9.    
    기억을 더듬고 있는 동안 밤이 깊어갔고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밤나무 아래에서 그가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 캐묻고 
    그와 관련된 나의 비밀을 알아맞히던 때의 빗소리였다. 
    학교에 오가는 길에 나누었던 대화, 견신례 수업 시간, 
    이렇게 한 가지의 기억이 끝나면 또 다른 기억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스 데미안과 맨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무슨 문제가 있었던가? 
    그 기억은 당장에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을 두고 그 기억을 되살리기에 열중했다. 
    그러자 그 생각도 다시 떠올랐다. 
    그가 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뒤 우리들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현관 아치 밑의 초석 안에 새겨져 있는 
    낡고 퇴색한 문장에 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며 
    누구나 그런 물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었다. 
    잠자는 동안 나는 데미안과 그 문장의 굼을꾸었다. 
    데미안이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조그맣고 잿빛이 되었다가도 
    때로는 굉장히 커져서 여러가지 빛깔을 띠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그것은 언제나 한가지고 
    똑같은 문장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는 나에게 그 문장을 삼키라고 명령했다. 
    그것을 삼키자 나는 질겁을 했다. 
    삼킨 문장 속의 새가다시 살아나서는 
    내 배를 채우고 뱃속을 쪼아대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죽은 듯한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놀라서 잠을 깼다. 
    정신이 말똥해졌다. 
    한밤중이었고 방 안으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났을 때 방바닥에 놓인 무언가 흰 것을 밟았다. 
    아침에서야 그것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림은 물에 젖은 채로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불룩하게 부풀어 올라 잇었다. 
    나는 그것을 말리려고 흡수지 사이에 끼워 두터운 책 속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 다시 보니 잘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림은 변해 있었다.
    붉은 입술은 다소 파리해지고 얼마간 가늘어져 있었다.
    이제야말로 정말 데미안의 입 그대로였다. 
    나는 그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본래의 그 새 모양을 나는 똑똑히 알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것은 너무 낡아서 때때로 다시 색칠을 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가까이에서조차도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새는 서 있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의 위에 앉아 있었는데 
    한 송이 꽃이었는지, 바구니나 둥우리였는지 또는 나무 꼭대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소한 것에 마음쓰지 않고 마음속에서 
    분명히 영상이 떠오르는 부분부터 그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분명치 않은 욕구에서 나는 곧 강한 색깔을 쓰기 시작했다. 
    새의 머리는 내 그림에서는 황금빛이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려나가 그 그림은 며칠 안에 완성되었다. 
    그려진 것은 날카롭고 겁없어 보이는 새매의 머리를 한 한 마리의 커다란 새였다. 
    그 새의 반신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어두운 지구에 박혀 있었고
     마치 커다란 알에서 깨어나오려는 것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그림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나에게는 꿈속에서 보았던 아롱진 문장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데미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부칠 곳을 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 무슨 일을 할 때나 느끼던 꿈과같은 예감으로 
    그것이 그에게 전해지거나 그렇지 못하거나가에 그
    에게 그 새의 그림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 위에다 아무것도, 내 이름조차도 적지 않고 가
    장자리를 조심해서 오래내고는 커다란 봉투에 데미안의 옛날 주소를 썼다. 
    그리고는 그것을 부쳤다. 
    시험이 다가왔고, 나는 옛날보다는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나의 행실을 바로잡은 이후로 선생님들은 나를 너그럽게 대해주셨다. 
    지금도 역시 나는 썩 선량한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선 어느누구도 반 년 전의 퇴학 처분 경고에 대한 
    기억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이제는 비난이나위협조가 아닌 옛날의 어조로 편지를 보내셨다. 
    나는 그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나 어떤 이유로 
    내게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이 변화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기대와 일치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었다. 
    이 변화로 나는 다른사람을 찾아가지도 않았고 
    남이 나에게 접근해오는 것을 허용치도 않았으며 
    단지 나를 한층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어느 곳인가를, 데미안을, 멀고 먼 운명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사실상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도 못했으면서 그 한복판에서 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베아트리체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 속의 초상이나 
    데미안에 대한 생각으로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는 완전히 내 시선과 생각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누구에게도 나는 꿈에 관해, 나의 기대와 내적인 변화에 관해 
    한마디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설사 그렇게 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원할 수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