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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8

Joyfule 2008. 10. 13. 00:52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8. 
    그는 내가 인사를 하려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태연하게 인사를 했는데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옛날과 똑같은 그의 악수였다! 
    꽉 움켜쥐는,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남성적인 악수! 
    그는 주의깊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싱클레어, 너 많이 컸구나.”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아 보였다.
     이제껏과 똑같이 늙어 보였고 동시에 똑같이 젊어 보였다. 
    우리는 함께 산책을 하며 순전히 딴 이야기만 했는데 
    그 당시의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몇 번이나 답장도 받지 못한 편지를 보냈던 일이 생각났다. 
    아, 제발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그 바보 같은, 바보 같은 편지를! 
    그는 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아직 베아트리체도 초상도 없었고 
    나는 황량한 시기의 한복판에 있었던 참이었다. 
    교외로 나가자 나는 주막집에 가자고 제의를 했다. 
    그는 함께 갔다. 나는 잔뜩 멋을 부리며 포도주 한 병을 주문해 잔에 채우고 
    그와 잔을 부딪치고는 학생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첫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술을 자주 마시니?”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응, 물론.” 나는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니? 
    아직까지는 제일 재미있는 일이니까.”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제법 근사한 점도 있으니까 말이야.
     ---도취의 황홀감과 바커스적인 요소가 말이야. 
    그러나 주막집에서 시간을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멋이 쉽게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해. 
    술집을 찾아다니는 일은 진짜 건달 같은 짓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야. 
    어떤 때는 하룻밤 내내 타오르는 관솔불 곁에서 
    진짜 아름다운 도취경과 흥분을 맛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언제나 같은 식으로 자꾸 술잔을 기울여댄다는 것이 정말 잘하는 짓일까? 
    매일 밤 단골 주막 술상을 보고 있는 파우스트를 상상할 수 있겠니?” 
    나는 술을 마시며 적의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누구나가 다 파우스트는 아니니까.”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는 다소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전처럼 싱싱하고도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웃음을 웃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따위 것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거지? 
    하여간 술꾼들이나 건달의 생활이 어떻게 보면 
    모범적인 시민의 생활보다 훨씬 더 생기있는 것이기도 할 거야. 
    그리고---언젠가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이야기인데---
    방탕하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한 최선의 준비활동이란 말이야. 
    예언자가 되는 것은 언제나 성 어거스틴 같은 그런 인물이거든. 
    그도 예언자가 되기 이전에 향락가였고 방탕아였었거든.” 
    나는 은근히 미심쩍은 심정이 되어 
    그에게서 훈계조의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렇지. 누구나 다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거니까. 
    솔직이 말해서 나는 예언자 같은 건 될 마음이 전혀 없어.” 
    데미안은 눈을 지그시 내리깐 채 알아들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 싱클레어.”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너에게 잔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말이야---
    무슨 목적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지는 우리 둘 다 모르고 있어. 
    하지만 너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 
    너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자, 이만 양해를 구하네. 나는 집으로 가야겠어.” 
    우리는 짤막하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몹시 마음을 상해서는 그대로 혼자 앉아서 남아 있는 술을 다 마시고 
    집으로 가려고 했을 때 데미안이 벌써 술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일이 더한층 마음의 울화를 돋우었다. 
    이 사소한 사건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가 그 교외의 주막에서 내게 한 말들을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한 마디도 잊지 않고 기억해낼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아직도 창틀에 고정되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그 그림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아직도 두 눈만은 생생히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눈초리였다. 
    아니면 나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눈초리였다. 
    온갖 것을 알고 있는 눈초리였다. 
    나는 데미안에게 얼마나 깊은 동경을 품고 있었던가! 
    그러나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나에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아마 어디에선가 공부를 계속하고 있을 터이고,
    그가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의 어머니도 우리 고장을 떠났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크로머의 일을 포함해서 나는 데미안과 관련된 온갖 일들을 다시 생각해내었다. 
    그가 일찍이 내게 이야기해주었던 것들이 생생하게 지금 다시 울려왔고, 
    그 말들은 오늘에 있어서까지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나와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우리가 별 기쁘지 않은 해후를 했을 때 
    방탕자와 성자에 관해 이야기를 했던 뜻도 갑자기 마음속에서 분명해졌다. 
    나에게도 그가 이야기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새로운 생에대한 충동과 함께 청순함에 대한 욕구와 
    성스러움에 대한 동경이 나의 마음속에서 솟구쳐오르기까니 
    나 역시 술주정과 더러움과 마비와 방탕 속에서 헤매고 다니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