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7.

Joyfule 2008. 10. 12. 00:53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7.
     꿈속에서는 자주 내가 그린 그림 속의 얼굴이 
    생기를 띠고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왔으며 
    아주 친한 듯이, 혹은 적대적인 태도로, 때론 이맛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히 아름다우며 조화된 고귀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역시 그러한 꿈을 꾼 후 잠에서 깨어나 
    갑자기 나는 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내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만큼이나 나를 잘 알고 있는 듯,
     옛날부터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흥분을 억누르며 나는 그 그림 속의 얼굴을,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칼과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입술, 
    그리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밝음을 지닌 억센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 그림은 저절로 말라 있었다). 
    나는 차츰 마음 속에서 눈에 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뛰어 일어나서 그 그림 앞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서 
    크게 뜬 초록빛이 감도는 눈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을 응시하였다.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약간 치켜져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이 오른쪽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주 가볍게 그러나 분명히 그 눈은 움직였고, 
    이 작은 움직임으로 나는 이 그림이 누구의 얼굴인지를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렇게 늦게서야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그 후 나는 종종 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데미안의 진짜 표정과 그 그림을 비교해보았다.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미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어느 초여름 석양 무렵, 서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기울어져가는 태양빛이 붉게 비쳐들었다. 
    방안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의 초상, 아니 데미안의 초상을 
    핀으로 창틀 가운데에 고정시키고 
    석양이 비쳐드는 모양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얼굴은 윤곽이 흐려져 몽롱해 보였지만 
    붉게 그늘진 눈과 이마의 밝음과 유난스레 붉은 입술은 
    더욱 생생하고 깊게 타올랐다. 
    석양은 곧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 앞에 마주앉아 있었다. 
    그러자 점차 그 얼굴은 베아트리체나 데미안이 아니라 --- 
    내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그림은 나와 닮진 않았다 --- 
    그럴 이유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지만 극서은 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나의 마음, 나의 운명 혹은 나의 데몬이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내가 다시 친구를 구한다면 그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게 된다면 사랑하는 이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의 삶과 나의 죽음 역시 그러할 것이엇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운명의 울림이었고 율동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이제까지 읽었던 어떤 책보다 
    한층 강한 인상을 남긴 책을 한 권 읽었다. 
    훗날에도 니체를 제외한다면 그러한 감동을 준 책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시간과 금언이 수록되어 있는 노발리스의 책이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을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 귀절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을 이끌어주고 나를고무시켜주었다. 
    지금 그 금언의 한 귀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그 귀절을 펜으로 초상의 아래에 적어두었다.
     ‘운명과 마음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이름들이다.’ 
    그 말을 나는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지은 소녀와 나는 여전히 자주 마주쳤다. 
    나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되었지만 
    늘 부드러운 화합과 감정의 어떤 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대와 나는 맺어져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실체가 아니라 그대의 영상만이 그럴 뿐이다, 
    그대는 내 영혼의 일부분인 것이다 라고. 
    막스 데미안에 대한 동경이 다시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그의 소식을 수년 내에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단 한번 방학 때 그를 만난 적이 있긴 했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이 잠깐 동안의 만남을이 기록 속에 숨겨두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수치와 허영심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나는 그것을 만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술집에 드너들던 시절의 어느 방학 때 
    언제나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옛모습 그대로, 
    멸시하고 싶은 얼굴을 한 거리의 건달들을 구경하면서 
    건들건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그 옛날 친구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번갯불처럼 프란츠 크로머가 생각났다. 
    제발 데미안이 그때의 일을 잊어버렸다면 좋겠는데! 
    그에게 신세 갚아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불쾌했다.---
    사실, 어리석은 아이 때의 일이었긴 해도 신세는 신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