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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자의 일생(Une Vie)

Joyfule 2009. 6. 22. 00:30

    2. 여자의 일생(Une Vie)

    줄거리 잔은 짐을 꾸리고 창가로 가 보았으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제 수도원을 갓 나온 잔은 영원한 자유의 몸이 되어 그처럼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인생의 온갖 행복을 막 손에 넣으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만약 날씨가 개지 않으면 부친이 출발을 망설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워 아침부터 여러 번 먼 하늘을 내다보았다. 잔은 열두 살까지는 집에서 지내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딸에 대한 미래 설계에 의해 모친의 눈물도 돌아보지 않고 수녀원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을 속세와 격리시켜서 남의 눈에 뛰지 않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모르게 해 놓았다. 열 일곱 살이 되면 순결한 채로 자기에게 돌려보내 줄 것을 모친은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소 일종의 올바른 시의 목욕통 속에 딸을 넣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들을 걸어 다니고 기름진 대지의 한복판에 소박한 사랑의 모습과 동물의 단순한 애정 생의 청량한 법칙을 보여 주고 딸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넋을 열어 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잔은 수도원을 떠나려는 것이다. 환하게 낯을 반짝이고 생기와 행복에 차서 한가한 낮 긴 밤 가지가지의 희망만이 떠오르는 고독 속에서 그 여자의 마음이 이미 떠돌아다니던 온갖 기쁨과 즐거운 가지가지의 우연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한여름을 이포르 근처의 절벽 위에 세워 놓은 선조 대대의 옛 성관인 레페플의 저택에서 보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 해변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에서 무한한 환희를 기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저택은 그 여자의 것으로 되어 있었고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그 곳에서 영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출발하려는 순간 전날 밤부터 쉴새 없이 내리고 있는 비는 그 여자의 생애에서 최초의 큰 슬픔이었다. 남작 부인은 몇 해 전부터 심장 비대증으로 부쩍 뚱뚱해져서 늘 심장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숨을 몹시 헐떡거리면서 낡은 호텔의 정면 층계까지 오자 빗물이 내처럼 넘쳐흐르는 앞뜰을 바라보고 "정말이지 제 정신은 아니로군" 하고 중얼거렸다. 남편은 늘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임자가 그러자고 한 거요. 아델라이드 부인" 부인이 아델라이드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다소 놀려대는 듯한 경의를 표해서 언제나 부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빗발 속에서 두 필의 말 엉덩이에서는 온통 젖어 김이 나고 있었다. 잔은 아름다웠다. 장미빛을 띤 살결에는 우단 같은 솜털이 나고 금발 머리는 광채를 내며 물결치고 있었다. 눈은 도자기처럼 푸르고 날씬한 키에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명랑한 웃음 소리는 환희의 물결이 되어 사방에 퍼졌다. 줄리앙 라마르 자작은 레페플 근처에 있는 그의 영지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모든 남성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느낌을 주었으나 모든 여성에게는 이상적인 완전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가 건강한 이마를 덮고 두터운 눈썹은 거무스레한 눈을 그윽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짙고 긴 속눈썹은 그 시선에 여자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은 정열적인 빛을 드리우게 했다. 아베 피코 사제의 소개로 알게 된 자작은 바로 이틀 후에 레페플로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 남작댁의 만찬에 초대받게 된 것이다. 심장 비대증 때문에 언제나 잔심부름꾼 로잘리의 팔에 매달려 걷는 아델라이드 부인은 자작을 보면 항상 그 팔을 끼고 부인의 산책길을 걸었다. 자작은 잔을 향해서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눈과 눈은 무엇엔가에 끌리듯이 마주치곤 했다. 라마르 자작과 함께 남작과 잔이 에트르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배가 둑에 가까워지자 남작이 맨 먼저 뛰어내려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자작은 잔이 발을 적시지 않도록 두 팔로 안아서 내려 주었다. 그 짧은 포옹에 흥분한 가운데 두 사람이 해안의 자갈길을 올라가노라니 뜻밖에도 고기잡이 라스티크 아저씨가 남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두 사람 귀에 들려왔다. "바로 이 사람이 점찍은 대로야 잘 맞는 귀여운 부부고 말고" 그 날 밤 잔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틀림없이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낸 주신 사람 내 생애를 바칠 사람일까? 그와 나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되고 떨어질 수 없이 한데 어울려져 그러다 사랑을 낳을 사이일까? 잔은 사랑하고 싶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날마다 더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작옆에 있으면 가슴이 뛰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 온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데보 남작이 외딸인 잔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침대 발치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르 자작이 우리에게 청혼을 해 왔다" 잔은 담요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아무튼 후에 대답하겠다고 말해 뒀지 네가 저쪽보다도 훨씬 부자지만 한평생의 행복이란 돈 문제가 아니거든 자작 형편으로서는 네가 결혼한 후에도 이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나 나나 그 남자가 맘에 든단다. 그렇지만 네가 어떨른지?" 잔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귀밑까지 새빨개져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러자 아버지는 딸의 푸른 눈 속을 들여다 보며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 데보 남작은 워낙 귀족 태생이어서 혁명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선량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의지가 약한 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결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