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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자의 일생(Une Vie)

Joyfule 2009. 6. 23. 00:48

    3. 여자의 일생(Une Vie)

    남작이 잔을 위해서 새로 만들게 한 배의 기도식이 있던 날이었다. 자작은 몰라볼 만큼 훌륭한 복장을 차리고 왔다. 몸에 착 붙은 프록 코트에 가슴에는 레이스 장식이 보이고 에나멜 장화를 신은 그 모습은 참으로 당당한 귀족이었다. 로잘리까지도 황홀한 듯 그 자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 부부와 젊은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해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꽃다발로 장식한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돛과 줄에 매달아 놓은 기다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윽고 성가를 부른 뒤 사제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광경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았다. 잔은 자작이 자기 손에 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가만히 그리고 차츰 세게 잔의 손을 죄어 왔다. 자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속삭였다. "잔 당신만 좋다면 이것이 우리들의 약혼식이 되는 겁니다" 잔은 고개를 숙였다. 아마 '네'하고 말을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배에 성수를 뿌리고 있던 사제는 두 사람의 손가락 위에도 성수를 몇 방울 떨어뜨려 주었다. 짧은 약혼 기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하고 코르시카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결혼 첫날 밤 무참히도 무너져 버린 환멸 속에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절망한 잔의 푸념은 그 후로도 내내 몸에 붙어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이것이, 그래, 그이가 말하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었구나? 이것이! 아니 이것이!" 남편 줄리앙은 호텔 주인이나 하인 마차꾼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상인들을 상대로 항상 다투었다. 그리고 다만 얼마라도 값을 깎게 되면 손을 비비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난, 도둑맞는 게 싫단 말이야" 계산서가 올 때마다 잔은 몸서리나는 것을 느꼈다. 일일이 말썽을 부리면서 에누리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하인들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귀밑까지 화끈해졌다. 호텔에 들어서서 점심을 마치고 나면 줄리앙은 잔을 껴안고 귓전에 속삭였다. "어때, 잠깐 쉬지 않겠어?" "난, 지금 별로 피곤한 줄 모르겠는데요"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한 거야 알겠어?" 잔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잔은 경멸하다시피 남편을 쳐다보았다. 잔은 줄리앙을 외면하였다. "호텔 것들이 뭐라던 그까짓 것 문제삼지 않아" 줄리앙에게는 수치심이라는 섬세한 신경이 전혀 없었다. 잔은 두 인간이 진정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융합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잔은 또한 남편의 그 부단한 욕망에서 무언지 야수적인 심한 오욕 이외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잔의 여성으로서의 감각은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고독한 것이다. 그런데 코르시카 깊숙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따가운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샘터로 나섰다. 융단을 빽빽하게 깔아 놓은 것 같은 이끼 위에 무릎을 꿇은 잔이 물의 싸늘한 맛을 즐기고 있는데 남편이 허리를 끌어안고 나무통 끝으로 흐르는 물을 가로채려 했다. 잔은 한사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며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 실낱 같은 물줄기가 꺼졌다가 맞히곤 하면서 얼굴과 목과 옷, 손에 물이 튀고 두 사람의 머리에서 진주처럼 빛났다. 그러다가 뜨거운 키스 시간이 물줄기와 함께 흘렀다. 잔은 갑자기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사랑의 영감을 느꼈다. 심장은 뛰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두 눈이 눈물에 젖은 잔은 나직이 남편에게 속삭였다. "줄리앙!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소리를 내어 즐겁게 웃으면서 빨갛게 물든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이후의 여행은 참으로 꿈과 같았다. 그칠 줄 모르는 환희의 연속이었다. 잔의 눈에는 오직 줄리앙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찬란한 남국의 여행에서 돌아오니 노르망디는 벌써 가을이었다. 노르망디의 가을은 하염없이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은 몹시 지쳤다. 즐거운 추억에 넘치는 이 시골의 풍물이 자취도 없이 퇴색해 보였다. 춥고 습기 찬 나날이 어제와 똑같은 단조로움으로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줄리앙은 어느새 아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자기 역을 끝마친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처럼 아내 일에 마음을 쓰는 기색도 없고 모든 사랑의 흔적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방을 찾아드는 밤도 드물어지고 그는 재산의 관리와 살림에 몰두하여 스스로 일꾼처럼 차리고 있어 약혼 시절의 고상한 태도를 찾아 볼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