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7.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Joyfule 2009. 11. 12. 03:56
   7.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써내려 온 글을 읽어보니 혼란스러움으로 머리가 빠개지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제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나요? 
혹시 저는 당신에 대한 변심을 열심히 둘러대고 있는 중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이렇게 마음이 조급한 것입니까? 
느낌들이 마구 엉켜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계속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이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도. 
당신과 알고 지냈던 지난 이 년 동안 저는 이 마을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우연일까요? 아닌 것만 같습니다. 
이 곳에 와서 맞부딪칠 얼굴이 저는 두려웠던 게지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 당신 말처럼 당신과의 관계가 불륜이었음을 나 스스로가 인정하면서, 
자랑할 만한 사랑을 하겠다, 그래서 당신을 잊어야겠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까?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것을 이렇게 복잡하게 얘기하고 있는 건 가요? 제가? 
그......여자, 그 여자는 왜......다시 집을 나갔을까요? 
당신을 믿어요. 
그 여자가 아버지께 한 말 중에 지금껏 기억에 남는 말은 유일하게 이 한마디입니다. 
그 여자의 당신이었던 아버지를 믿었으면서도, 
그 여자는 왜 그렇게 도망치듯 집을 나갔을까요. 
어머니 때문이었을까요? 
그 여자는 어머니가 잠시 다녀간 다음 날 집을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께서 그 여자에게 무슨 대거리를 한 것도 아니에요. 
어머니는 오셔서 그 여자가 업고 있던 막냇동생을 받아 안았을 뿐입니다. 
지치셨던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어머니께서 견디시는 방법이셨는가? 
어머니는 그저 말없이 아이를 받아 안고서 젖을 먹이셨어요. 
어머니 젖은 퉁퉁 불어서 푸른 힘줄이 불끈불끈 솟아 있었습니다. 
어린애가 한참을 빨고 나니까 그 힘줄이 가셨습니다. 
봄볕이 내리쬐는 그 봄날에 마루에 앉아 젖먹이는 어머니와 
그 곁에 서서 그저 마당만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 여자라니. 
어머니는 젖을 빨다 잠이 든 어린애를 포대기에 싸서 마루에 눕혀 놓고, 
토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제게로 오셨어요. 
그 때, 제 손에 그 여자가 만들어 준 설기떡이 쥐어져 있었던가 말았던가. 
그 풍경을 생각하니 눈물이 번지는군요. 
어머니는 한 칸씩 위로 채워진 제 웃옷 단추를 다시 끌러서 제대로 채워 주시고, 
벗어 놓은 제 신발에 담긴 흙부스러기를 털어내 주시고서는 
물끄러미 제 눈을 들여다보시더니 다시 가셨어요.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요. 
단지 그뿐이었는데 그 다음날 그 여자는 나갔습니다. 
뒤란 마당까지 깨끗이 쓸고 난 다음이었어요. 
실에 꿴 감꽃을 주렁주렁 목에 매달고 있는 제 손을 그 여자는 잡아당겼어요. 
점심상은 방에 차려 놨어. 동생은 방금 잠들었구. 
깨어나면 기저귀 속에 손 넣어 봐서 오줌쌌거든 얼른 갈아 줘...... 
그러구 아버지가 날 찾거든 모른다고 해라. 
언제 나갔는지 모른다고 해, 알았지? 
어느새 그 여자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입었던 저고리와 치마로 바꿔 입고 있더군요. 
분을 옅게 바르고 있어서 얼굴빛이 더욱 뽀앴습니다. 
처음 우리 집에 온 날 저를 어지럽게 하던 그 은은한 향내가 그 여자에게서 다시 났어요. 
큰오빠가 무서워 다락에 숨었다가 거기서 잠이 들어 버려 
굴러 떨어진 뒤로는 맡지 못했던 냄새였습니다. 
어느 날 그 여자가 제게 책을 읽어 주고 있는데, 
어느 대목이 재미있어서 막 웃고 있는데, 큰오빠가 들어왔어요. 
큰오빠는 저를 노려보더니 다시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죠. 
저녁에 큰오빠에게 혼날 일을 생각하니 무섭기만 했어요. 
그래서 숨은 곳이 불이 안 들어서 쓰지 않고 있던 빈방의 다락이었어요. 
그 다락은 경사진 좁은 계단을 몇 개 통과해야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저녁밥도 안 먹고 잠이 들어 버렸어요. 
다락에서 잠이 든 줄도 모르고 잠청을 하다가 밑으로 굴러 떨어져 내렸지요. 
제가 쿵, 떨어졌을 때 달려온 이는 그 여자, 그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는 제 엉덩이를 세게 때렸어요. 
집을 나가 버린 줄 알았잖니 이것아! 
그 여자는 거의 울 듯했어요. 저 때문에 말이에요. 
제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다른 식구들은 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아버지까지도 주무시고 계셨는데, 그 여자는 그때껏 마루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그 때, 그 여자는 악마다'라고 했던 큰오빠의 말이 다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에게서 느껴지던 어질 머리가 그 다음으로 다 사라, 사라졌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그 향내를 다시 풍기면서 그 파란 페인트칠 대문을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처음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앉아 있었던 그 마루에 앉아서 집을 나가는 그 여자를 바라봤어요. 
역시 환한 햇살 속에서요.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어서 아버지가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 때 제 눈에 띈 게 칫솔 통이었습니다. 
그 속엔 그 여자의 노란 칫솔이 그대로 있었어요. 
저는 키를 세워 그 칫솔을 꺼냈어요. 
그리고 마구 달려갔습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은 큰길과 소롯한 수리 조합 둑길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수리조합 길로 걸어가고 있더군요. 
저는 정신없이 뛰어 그 여자 뒤에 섰어요. 
제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음직도 한데 
그 여자는 그저 여민 치마 한 끝을 싸쥐고 뒷모습만 보이더군요. 
그 여자 뒤에 바짝 서서 그 여자의 치마를 잡아당겼습니다. 
그 때서야 그 여자는 돌아다봤습니다. 아, 그 때 그 여자의 얼룩진 얼굴이라니. 
눈물에 분이 밀려나서 그 여자 얼굴은 형편없었어요.
칫솔을 내밀자 그 여자는 웃을락말락 했습니다. 
그 여자는 내 손에 있는 칫솔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손을 그대로 꼭 잡았습니다. 
그러고선 제 손을 깊게 들여다봤어요. 
나...... 나처럼은...... 되지 마. 
그 여자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습니다. 
그러고선 곧 저를, 저를 떠밀었어요. 어서 가 봐. 동생 잠 깨겄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