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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Joyfule 2009. 11. 13. 10:11
       8.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오늘은 비가...... 명주실 같은 저, 봄비......가 
    자꾸만 바깥을 내다보게......귀...... 귀기울이게 해요. 
    방금 저는, 아버지와 저 속을 쏘다니다 왔어요. 
    들과 산과 빨래터를요. 산등을 따라 죽 이어지는 봉우리들까지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산쑥은 물론이요, 연둣빛 능선에는 벌써 산수유가 피어서 가는 비에 파들거렸어요. 
    실비라서 우산 쓸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는데,
    돌아올 때는 제 머리결이, 아버지 어깨가 축축했어요. 
    새를 잡으러 나갔었습니다. 
    단 한 마리도 못 잡았으니 잡으러 나갔다기보다 쫓아다니다가 왔다는 게 맞는 말이겠군요. 
    아버지께서 오후 한 차례씩 엽총을 어깨에 메고 
    들과 산으로 사냥을 나가신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안 일입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벌써 이 년째 습관처럼 하시는 일이라는데요. 
    하긴 저는 지난 이 년 동안 여길 오지를 않았었으니까요. 
    사냥이라고 써 놓고 보니 말이 크군요. 
    그 큰말의 울림 속에는 원시적인 게 섞여 있네요. 
    이젠 사냥이 딱히 동물을 잡는다는 뜻으로만 쓰이지는 않습니다. 
    제게 와 닿는 사냥이라는 말의 울림은 아직 원시적입니다. 
    저 먼 부족이나 더 멀리 씨족들이 무리 지어 살았던 때로 생각이 거슬러 갑니다. 
    그들은 이런 상상을 하게 해요. 
    길도 없는 아니 어느 곳이나 길이 되는 산자락 밑이나 
    들판 한가운데에 짚으로 엮어 만든 수십 채의 움막집, 
    그 움막집 앞엔 늘 타고 있는 불기둥, 그 불길은 더 깊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움막 집집마다에 한 가족들이 보입니다. 
    남편과 아내와 여러 아들과 딸들이 그 속에서 서로 엉켜 삽니다. 
    그들은 거의 알몸입니다. 햇볕에 그을린 살갗은 희지 않습니다. 
    그들의 머리결은 검고 윤기가 흐르며 숱이 많습니다. 
    종아리와 팔뚝엔 알통이 불쑥 나와 있으며, 
    가족들 모두 엉덩이가 바람이 빵빵한 공처럼 둥글어서, 
    걸을 때마다 누가 발로 차내는 듯이 실룩거리는 겁니다. 
    그런 그들이 모두 함께 사냥을 나갑니다. 
    짐승을 동그랗게 둘러싸 몰려면 숫자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때, 여자들은 누구나 자식을 덩실덩실 여럿 낳고 싶어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산맥같이 얽혀서 사냥해 온 멧돼지나 오소리, 
    때때로 곰을 그 움막집 앞의 불길에 굽는 겁니다. 
    사냥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라야 하지 않을까요. 
    말을 이렇게 해 놓고 보니, 
    방금 다녀온 아버지와의 새 사냥은, 사냥이라 하기가 민망하군요. 
    그냥 새잡이라고 해두지요. 
    처음부터 아버질 따라나설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니었습니다. 
    마당으로 나 있는 창문으로 아버지께서 스쳐 지나시기에 
    저는 의아한 마음으로 창을 통해 아버질 따라가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차림이 특이했거든요. 
    아버진 털이 보숭보숭하고 각이 진 밤색 모자를 쓰고 계셨는데, 
    갈색 가디건에 검정 목티를 받쳐입고 계셨는데, 
    헐렁한 상아색 골덴 바지에 벨트를 꽉 조인 차림이셨는데,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계셨는데, 
    맑게 쏟아지는 봄볕을 뚫고 가시는 그 모습이 꼭 사냥꾼 같았습니다. 
    아버지께서 헛간 벽에 걸어 둔 엽총을 꺼내 어깨에 메셨을 때, 
    그 엽총은 완벽한 소품이 되더군요. 
    분장을 마친 아버진 대문을 나가셨습니다. 
    그 때, 저도 방문을 열었지요. 
    처음엔 그저 어리광쟁이 어린애처럼 
    앞서가시는 아버지 장화 발짝에 제발 짝을 갖대 대며 뒤따랐습니다. 
    한쪽으로 우리 부녀의 그림자가 나란히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기 전까지 아버진 꽤 늠름해 보였습니다. 
    바람이 불자 상아빛 골덴 바지가 아버지 몸에 달라붙는 거였지요. 
    저는 뒤따르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바지 안에 아버지 몸이 과연 있는 걸까? 믿어지지 않게 바람만 쿨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제 기척이 끊기자, 아버진 뒤돌아보셨습니다. 
    털모자를 쓴 아버진 제가 당신 가까이 다시 다가설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작아지시다니, 
    털모자 밑으로 보이는 뒷목덜미까지 흰머리가 수북했습니다. 
    귀밑으론 탄력을 잃은 살이 처져 겹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까지 무수히 핀 검버섯이라니. 
    저 깊은 곳에서 고함이 터져나왔어요. 
    당신을 향해 지르는 것도 같았고, 어쩌면 삶을 향해 내질렀는지도 모르지요. 
    연민에 휩싸여 아버지 골덴 바지 뒷주머니에 제 두 손을 포옥 집어넣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잡아당긴 셈이라 아버진 순간 
    몸의 중심을 잃으시고서 뒤에 서 있던 제게 쏟아지셨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앙상한 아버지의 엉치뼈. 
    아버진 오는 콩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들에서도 산에서도 빨래터에서도. 허심해 보이는 산비들기를 향해 
    나무 뒤에 거의 나무처럼 붙으셔서 겨냥하시기도 했지만 매번 헛방이었습니다. 
    그러실 때마다 아버진 저를 바라다보며 겸연쩍게 웃으셨어요. 
    아버진 제 앞에서 날아가는 새를 멋지게 쏘아 맞추고 싶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 사냥은 아버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냥 얘기를 하다 보니 당신에게서도 언젠가 사냥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당신은 아프리카 어느 마을 원주민들에 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은 기마 민족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밀림을 달려 사냥을 해서 
    물물 교환을 하며 후손들을 번창시켰다고 했습니다. 
    밀림은 길이 되고......밀림은 농사 지을 땅이 되고, 
    원주민 장정들은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밤낮으로 무기를 손으로 만든다면서요. 
    마을 여자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들에 나가서 구슬땀을 흘리며 
    식구들의 식량을 일구며 하루해를 보내는데, 
    장정들은 동이 트자마자 떼를 지어 황야로 나간다지요. 
    창을 들고 활을 메고 말이에요. 
    그들은 황야로 나가 온종일 서성거리다 돌아오는 게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젠 함성을 지르며 사냥할 짐승도, 피 흘리며 싸워야 할 다른 부족도 없는데, 
    그들은 그들 선조들이 해 왔던 사냥과 전쟁의 습속을 버리지 못해 
    온종일 지평선을 바라다보다 돌아온다지요.
    당신께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정말이에요? 하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나의 오라버니들같이 느껴지는 건 웬 까닭일까요? 
    떼를 지어 웅성웅성 온종일을 서성거리다가, 
    붉디붉은 황혼을 등에 지고, 공허하게 마을로 돌아오고 있는 그들 속에서 
    제가 제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면 당신, 당신은......웃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