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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Joyfule 2009. 11. 14. 10:07
       9.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당신과의 약속 시간은 이제 이 밤만 지나면 다가옵니다. 
    당신은 정말 떠나실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지금 무엇을 참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이 떠나 버리면 제가 참고 있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하루는 종일 중얼중얼거렸어요. 
    당신에게 달려가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려 할 적마다, 
    저를 스쳐 간 당신과의 기억들이 모두 나쁜 것이었다고, 
    속삭이고 속삭였어요. 
    그래도 불쑥 열이 났고, 당신에게 가야지, 잠깐씩 가방을 챙기기도 했어요.
     행여 당신이 저를 데리러 오지 않나, 여러 번 대문을 내다보기도 했어요. 
    어렵게 견뎌 내고 찾아온 이 밤. 이미 당신에게로 가는 기차는 끊겼는데,
    내일 새벽 첫차는 몇 시던가,
     저는 지금 그걸 헤아려 보고 있으니, 이 밤이.....무섭습니다. 
    산버찌를 먹으면 눈물날 일이 생긴다고 
    제가 산에서 버찌를 따오면 어머니는 마당에 쏟아 버리시곤 하셨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눈물날 일이 이것 인가요? 
    어머니 몰래 먹은 산버찌가 지금 저를 울리는 것인가요? 
    아버지는 그 여자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오면 손 크림을 발라 주셨지요. 
    왜 그것만이 유난히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버지의 손과 그 여자의 손이 전혀 스스럼없이 
    서로 엉키는 것이 꼭 꿈결인 것만 같았어요. 
    손 크림을 통에서 찍어 내 그 여자의 손에 
    골고루 펴 발라 주실 때 아버지의 그 환한 모습을,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손. 그래요. 그 시절의 아버지와 그 여자는 
    손을, 둘이서 있을 땐 늘 손을 잡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손 크림을 발라 주는 한 컷으로 합쳐져서 생각나는 모양입니다. 
    손잡는 일이 뭐 대수겠습니까만, 
    저는 지금도 아버지 손을 꼭 잡아 보지 못한걸요. 
    당신의 손. 저도 당신 손을 참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운전하는 당신의 손등에 제 손을 갖다 대며, 
    당신 손이 참 좋아요,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당신 손엔 늘 결혼 반지가 끼여 있었어요. 
    그걸 볼 때마다 쓰라람이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갔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이 결혼 반지를 끼고 있는지조차 모르시는 듯 했어요. 
    그 반지는 그저 당신의 일부분처럼 거기 끼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마음에 휘몰아칠 때마다 당신의 손을 찾아 쥐었습니다. 
    그러면 서러운 마음이 가라앉곤 했어요. 
    저는 당신에게 반지 말고 다른 것을 받았다고, 
    설령 그 받은 것 때문에 제가 그 속에 갇혀 죽는다고 해도...... 
    제겐 그것만이 유일하다고 그렇게 저를 달래고는 했...... 
    사랑하는 당신! 
    ......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마을은 저를, 저 자신을 생각하게 해요. 
    자기를 들여다봐야 하다니요? 싫습니다! 저는 지쳤어요. 
    그 여자가 떠나던 날, 그 여자에게 칫솔을 건네주던 때, 
    그 때 저는 그 여자와 무슨 약속인가를 했다고, 
    지금이 그 약속을 지킬 때라고......
    이 생각을 당신이 있는 그 도시에서 제가 어떻게 해낼 수 있었겠어요. 
    그 여자가 그 때 떠나 주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됐을까?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그 여자가 떠나 주지 않았어도 과연 
    우리 가족들이 지금 이만한 평온을 얻어 낼 수 있었을까?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여자가 우리 집을 떠나고 나서 아버지는 오랫동안 술에 취해 계셨습니다. 
    아무 데나 마구 토해서 부축할 수도 없었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환했던 때는 
    그 여자가 있던 그 시절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 
    그것만이 우리 삶의 다라고 여길 수 없는 
    불편한 부분이 이 마을에는 흐르고 있어요.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저는 그 불편함에 의해 끔찍해져 있는 여기에,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것밖에 달리 제 마음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요. 
    양잿물을 들이마신 것같이 쓰라리게 당신이 그리워요. 
    지금...... 막, 당신과의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 
    순간, 숯불이 얹혀지는 듯한 뜨거움이 가슴에 치받쳤습니다. 
    이 치받침은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동안 나의 하루는 
    이 치받침으로 시작해서 이 치받침으로 끝나곤 했으니, 
    나에겐 오히려 동무 같은 감정이예요. 
    당신을 만날 때의 반가움, 
    당신의 얼굴을 만져 보고 싶은 수줍음, 
    당신이 없는 동안의 그리움, 
    누구에게도 당신을 자랑할 수 없어서 
    곧잘 얼굴이 발그레해졌던 무안함까지 
    그 치받침 속에는 섞여 있습니다. 
    그렇게 익숙한 것이지만, 
    방금 것의 치받침은 한 세계를 무너뜨리느라고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가까이 가선 안 될 게 얼마나 많은 지요. 
    그 안된다는 것 때문에 또 얼마나 애가 타는지요. 
    가슴을 방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었어요. 
    오늘 이 치받침은 이렇게 삭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달리 삭힐 방법이 제겐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떠날 것인가? 
    한 시간 전부터 저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여기 있었습니다. 
    시침이 오후 3시를 막 지나갈 때, 
    그토록 간절히 붙잡고 있던 당신과의 끈을 놓아 버린 셈입니다. 
    제가 놓아 버린 한 끝은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잡고 있는 거기 한 끝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인가요? 
    당신은 지금 시계를 들여다보며 거기 서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