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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4.

Joyfule 2010. 1. 12. 10:32

 

 

 

    사씨남정기 - 김만중.4.  


세월이 물 흐르듯이 빨라서 어느덧 삼상(三喪)을 마치고

유한림이 직임에 나가니 황제가 중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한림이 조정의 소인을 배척하는 기개가 강직하므로

엄승상이 꺼리고 방해하였으므로 벼슬도 제대로 승진하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유한림의 나이가 삼십에 이르렀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망연하였다.

사부인이 이를 근심하고 한림에게 호소하였다.
"첩의 기질이 허약하고 원기가 일정치 못하여

당신과 십여 년을 동거하였으나 일점 혈육이 없으니

불효삼천 가지 죄에 무자(無子)의 죄가 가장 크다 하여

첩의 무자한 죄가 존문에 용납하지 못할 것이나

당신의 관용하신 덕으로 지금까지 부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매 당신은 누대독신(累代獨身)으로

이대로 가다가는 유씨 종사가 위태로우니 첩을 개의치 마시고

어진 여인을 취하여 득남득녀하면 가문의 경사일 뿐 아니라

첩의 죄도 면할 수 있을까 합니다."


유한림은 허허 웃고서 부인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소생이 없다 하여 당신을 두고 다른 첩을 얻을 수야 있소.

첩이 들어오면 집안이 어지러워지는 근본인데 당신은 왜 화근을 자청하는 거요?

그것은 천만부당하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오."
"첩이 비록 용렬하나 세상 보통 여자의 투기를 잘 알고 경계하겠으니 첩의 걱정은 마시오.

태우의 일처일첩은 옛날에도 미덕이 되었으니

첩이 비록 덕이 없으나 세속 여자의 투기는 본받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고모 두부인이 한림 부부의 사정을 살피고,
"듣건대 옛날에 관저와 수목은 진실로 태자의 투기함이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덕이었지만 만일 문왕이 미색을 탐하시고

의종이 편벽하셨으면 태우가 투기는 하지 않았더라도

어찌 궁중에 원한이 없었으며 규중이 평생 어지럽지 않겠느냐.

지금 시속이 옛날과 다르고 성인이 아닌 범인으로서

어찌 투기가 생기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랴.

공연히 옛날의 미명을 사모하여 화근의 씨를 뿌리지 않도록 함이 좋다."


"제가 어찌 고인(古人)의 미덕만 앙모하겠습니까마는

시속 부녀가 인륜을 모르고 시부모와 남편을 업신여기고

질투로 일을 삼아서 가도를 문란케 하는 것을 기탄하는 바이오니

첩이 비록 어리석어도 교화를 못할지라도 그런 패악을 창수하겠습니까.

제가 비록 어리석으나 몸을 반성하지 못하고

요색에 침혹하는 일은 결코 않기로 맹세하옵니다.

그보다도 가문을 이을 후손을 보는 것이 더욱 중합니다."


사부인의 뜻이 이미 굳게 정한 것을 보고 탄식하여,
"네 뜻은 매우 갸륵하다.

그러나 가부가 만일 너 같은 현부의 간언을 청납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말을 생각하고 뉘우칠 테니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고 두부인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매파가 와서 사부인에게 권하였다.
"한 곳에 마땅한 여자가 있는데 부인이 바라고 구하는 뜻에 맞을까 합니다."
"내가 구하는 여자가 어떤 것인 줄 알고 하는 말이오?"
사부인이 묻자 눈치 빠른 매파는,
"댁의 둘째 부인으로 구하시는 뜻이 요색을 취하심이 아니고

사람이 믿음직하고 덕이 있으며 몸이 건강하여

아들을 낳아서 후손을 이을 수 있는 여자인가 짐작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용모와 재색만 잘난 여자는 부인께서 구하시지 않으실 줄 압니다."
"호호호. 대관절 그 여자의 근본을 자세히 말해 보소."
"양반댁 사람으로서 성은 교(喬)요, 이름은 채란(彩蘭)인데,

조실부모하고 지금은 그의 형에게 의지하여 있는데 방년이 십육 세입니다."
"다행히 벼슬 다니는 양반댁 딸이라면 하류천녀와 다를 것이니 가장 마땅하오."
하고 남편 한림에게 매파의 말을 전하면서 권하였다.
"내가 소실을 두는 것은 바쁘지 않소.

그러나 당신의 말이 관대하여 받아들이겠으니 택일해서 좋도록 하소."


그리하여 곧 그 집에 통혼하고 집에서 친척을 모아 간략한 잔치를 열어서

교씨를 제이 부인으로 데려왔다.

교씨는 유한림과 본부인에게 예배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빈 일동이 교씨를 바라보니 자태가 매우 아름답고

거동이 경첩하여 마치 해당화 꽃가지가

아침 이슬 머금은 듯이 고와서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두부인 혼자만은 안색이 우울해지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교씨를 화원별당에 머무르게 하고

유한림이 새로운 둘째 부인과 밤을 지냈는데 남녀의 두 정분이 각별하였다.


이때 두부인이 질부되는 사씨에게,
"한림의 둘째 사람은 마땅히 질둔유순한 여자를 얻어야 할 것을 잘못 택한 것 같다.

저토록 절색가인을 얻었으니 만일 저 여자의 성품이 어질지 못하면

장차 집안이 평온치 못할 것 같아서 걱정이다."
하고 미리 걱정하였다.

그러나 사부인은 태연한 태도로,
"옛날의 위장강의 고운 얼굴과 공교로운 웃음으로도 현덕지덕을 가작하여

지금까지 절대가인이 반드시 간교롭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색이 곱다고 어찌 어질지 않으리까?"
"장강은 어진 부인이었지만 자색은 그리 곱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하고 서로 웃었다.

그러나 이튿날 두부인은 사씨에게

재삼 새로 맞은 교씨를 조심하라고 이르고 돌아갔다.


유한림은 교씨 처소의 당호를 고쳐서 백자당(百子堂)이라 하고,

시비 납매 등 다섯 명으로 교씨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교씨는 총명민첩이 지나친 교활한 솜씨로 유한림의 마음을 잘 맞추며

본부인 사씨도 잘 섬겼으므로 집안이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