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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 6

Joyfule 2010. 1. 14. 09:14

 

    사씨남정기 - 김만중. 6 

 

 

가랑은 화방 계집으로서 온갖 풍악에 능숙하였는데

교씨의 부름을 받고 와서 곧 뜻이 맞고 정이 깊어졌다.

교씨는 본래 영리하였기 때문에 가랑에게 음률을 배우기 시작하자

거문고와 노래 솜씨가 일취월장하였다.

교씨는 음률의 스승이자 이야기 친구인 가랑을 옆방에 숨겨두고

유한림이 조정에 나가고 없는 틈에 음률을 배웠다.

그리고 유한림이 집에 있을 때는 그 배운 솜씨의 음악으로

유한림의 심정을 혹하게 해서 더욱 총애를 받고 마침내 몸까지 독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한림은 사부인과는 점점 멀어져서 침소에는 얼씬도 않고

교씨 침소에만 사로잡혀 있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날도 유한림이 조정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므로

요리를 차려 놓고 가랑과 함께 술을 즐기면서 가곡을 희롱하고 있는데,

사부인의 시비가 와서 명을 전하고 같이 가자고 재촉하였다.

교씨가 황급히 주안상을 치우고 시비를 따라서

사부인이 있는 화원의 정자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인은 넌지시 좋은 낯으로 맞아서 자리에 앉힌 뒤에 조용히 물었다.
"교랑 침소에 와 있는 미인이 어떤 여자지?"
"친정 사촌 누이입니다."
교씨가 거짓말을 하였다.

사부인이 엄숙한 태도로 정색을 하고,
"여자의 행실은 출가하면 시부모 봉양과 낭군 섬기는 여가에

자녀를 엄숙히 교육하고 비복을 은혜로 부리는 것이 천직이 아닌가.

그런데 방종하게 음률과 노래로 소일하면

가도가 자연 어지러워지니 교랑은 잘 생각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

그리고 그 여자는 곧 제 집으로 보내며 이런 내 말을 고깝게 여기지 말게."
"제가 배우지 못하여 그런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이제 부인의 훈계 말씀을 들었으니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사부인은 재삼 위로하고 조금도 오해하지 말라고 자상하게 일렀다.

그리고 그날이 지도록 화원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하루는 유한림이 조정에서 돌아와서 백자당에 들렀으나

술이 취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난간에 기대서 봄밤의 원근 경치를 바라보니

달빛은 낮같이 밝고 꽃향기 그윽하매 호흥(好興)이 발작하였다.

그래서 교씨에게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하라고 청하자 교씨가 딴청을 썼다.
"바람이 차서 감기가 들었는지 몸이 불편하여 못하겠으니 용서하십시오."
"허허, 그게 무슨 말인고.

여자의 도리는 남편이 죽을 일을 하라고 해도 반드시 어겨서는 안 되는 법인데

그대가 병 핑계로 내 말을 거역하니 무슨 못마땅한 일로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실은 제가 심심하기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더니

부인이 불러서 책망하기를 네가 요괴스럽게 집안을 어지럽게 하고

한림을 혹하게 하니 다시 그런 행동을 말라고 꾸중하셨습니다.

만일 또다시 노래를 부르면 칼로 혀를 끊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다 하셨습니다.

제가 본디 비천한 계집으로 유한림의 은혜를 입사와

부귀영화가 이같이 되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 부르시라는 노래를 못하는 고충을 짐작하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더구나 한림의 청덕이 저의 잘못으로 흠이 되고 흐려지실까 두려워합니다."
교씨가 공교로운 말로 은근히 사부인을 좋지 않게 중상하자

유한림이 깜짝 놀라면서 속으로 본부인 사씨의 질투라고 생각하고 교씨를 위로하였다.


"내가 그대를 취함이 모두 부인의 권고로 이루어진 것이요,

지금까지 한번도 그대에 대하여 나쁘게 대하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이제 부인이 그대에게 그런 책망을 한 것은 필경

비복들이 부인에게 참언으로 고자질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부인은 본디 성품이 유순한 사람이라 결코 그대를 해치려고 할 리가 없으니

부질없는 염려는 말고 안심하라."
교씨는 가슴이 투기로 타올랐으나 대범한 유한림의 말에는 잠자코 있었다.

그것이 더욱 유한림의 동정을 사게 되었다.
속담에도 범의 그림에서는 뼈를 그리기 어렵고,

사람의 사귐에는 마음을 알기 어렵다고 하듯이,

교씨는 교언영색으로 말은 겸손한 탈을 쓰고 있었으므로

사부인은 교씨가 겉다르고 속다른 본심을 알 수 없었다.

 

사부인이 교씨를 훈계한 것은 조금도 질투에서 나온 사심은 아니었다.

다만 음란한 노래로 장부의 마음을 미혹할까 염려한 것보다는

실로 교씨에게 정숙한 여자의 몸가짐을 하라는 심정에서 충고한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씨는 사부인의 충고에 원한을 품고 교묘한 말로 유한림에게

은연한 참언을 하여 내화를 빚어 내게 하였으니 이것은 교씨의 요악한 투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한림의 친한 벗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의 집사로 있던

남방 사람 동청(董淸)을 천거하여 문객으로 두라고 권하였다.

유한림이 마침 집사를 구하던 중이라 집에 두고 집일을 보게 하였다.

동청은 영리하고 민첩하여 남의 마음을 잘 맞추어서 영합하기를 잘하였다.

친구도 그의 마음이 착하지는 못하여도 마음을 잘 맞추어서 좋게 여기다가

외임으로 떠나게 되자 동청의 허물은 말하지 않고 유한림에게 천거하고 갔던 것이다.

유한림이 동청을 불러서 사람됨을 보았을 때에 동청의 언사가 민첩하여 흐르는 물 같았다.

유한림은 믿는 친구의 추천에다 그처럼 영리하였으므로 곧 집에 두고 서사(書士)의 일을 시켰다.

그런데 동청의 위인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유한림에게 아첨하고 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순진한 유한림이 기뻐하고 신임하게 되었다.

그런 동청의 태도를 본 사부인이 한림에게 귀띔하였다.


"들리는 말에도 동청의 위인이 정직하지 못하다 하니

큰 일을 저지르기 전에 내보내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전에 있던 곳에서도 요악한 일을 많이 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쫓겨났다 하니 곧 내보내십시오."
"남의 풍설의 진부를 알 수 없고 친구의 추천으로 받아들였으니

좋고 나쁜 것은 좀 두고 보아야 할 것 아니오."
"사람은 부정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주위 사람까지 부정에 물들게 되는 법이니

빨리 내보내서 가도를 어지럽히지 말도록 예방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만일 그런 표리부동한 사람 때문에

지하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가법을 추락시키면 그때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세상 사람들이

남을 중상하기 좋아해서 하는 풍설인지 모르니 좀 써 봐야 진부를 알 것이며

좋지 못할 것을 발견했을 때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