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의를 이루는 길
< 거짓과 무고를 삼가라 >
요새 고소와 고발이 많아지면서 무고도 늘어나고 있다. A가 B를 명백한 증거나 정황이 없이 말로만 범인이라고 지목할 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지목된 B를 범인으로 무조건 찍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면 의가 세워질 수 없다. 나중에 B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도 그때는 이미 죽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된 후이기에 거의 회복 불능 상태가 된다. 그래서 무고죄는 언젠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초래한다. 예수님도 무고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가끔 누군가가 무고나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을 보면 상사초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안쓰럽다. 상사초가 잎이 다 떨어진 후 꽃을 피우는 것을 알지만 현재 눈앞에서 잎이 다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쓰러운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한을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참된 증인의 삶을 새롭게 다짐하라. 나라도 힘써 진실을 추구하면 거짓과 무고가 판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오듯이 언젠가 진실의 때는 반드시 온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한 맺혀 살지 말라. 일상에서의 시간과 약속도 잘 지키는 진실한 사람이 되라. 거짓과 무고는 사탄의 핵심 무기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고 유혹해 태초의 인류를 죄에 빠뜨렸다. 그래서 원죄가 있는 인간은 거짓과 무고로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깨뜨릴 가능성이 늘 있다.
< 사회 정의를 이루는 길 >
살다 보면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감정을 따라 판단하지 말고 정의를 따라 판단하는 습성을 기르라. 다수를 존중하되 다수가 무조건 옳다고 여기지 말고 군중심리와 편견으로 나의 판단이 왜곡되지 않게 하라. 성도로써 사회 정의를 이루는 데 일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힘써 진실을 추구하라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1절). 그리고 예수님을 3가지 항목으로 고발했다. 백성을 미혹한 것,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지 않게 한 것,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2절).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고발은 명백한 무고였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눅 20:25). 또한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이나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고발도 거짓과 과장이 섞인 무고였다.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들은 낯선 인물인 예수님이 대중의 추앙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시기심을 가졌지만 드러내고 해할 수 없으니까 거짓과 무고로 예수님을 해하려고 계획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상식과 전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을 절대화시키면 몰상식이 된다. 또한 전통이 정통은 아니다. 내가 많이 안다는 자부심도 버리라. 아는 것이 힘이지만 때로는 아는 것이 병이다.
안다는 것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거나 배움을 소홀히 하면 결국 지식이 불신과 무지를 낳는다. 또한 내가 가진 지식이 잘못된 지식인 경우도 많다. 특히 거짓과 무고에 휩쓸리면 잘못된 지식을 가지기 쉽기에 내가 아는 지식으로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 내가 많이 알고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자기 무지를 깨닫지 못하면 참된 진리도 깨닫지 못한다. 늘 배우려는 자세로 진실을 추구하라. 헛된 자기를 지키려고 거짓과 무고에 빠져들지 말고 참된 자기를 찾으려고 힘써서 복된 삶의 가능성을 높이고 사회 정의 실현에도 일조하라.
2. 의롭게 결정하고 선택하라
교권주의자들의 고발을 받고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하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네 말이 옳도다(3절).” 그 대답은 헬라어 원어로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라는 뜻으로서 “그렇다.”라는 단정적인 대답보다는 “네가 스스로 판단하라.”라는 뉘앙스의 대답이었다. 그처럼 예수님이 왕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말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4절).”
빌라도는 이미 예수님이 반역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무장봉기나 반란 증거도 전혀 없었기에 처음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다. 그러자 무리가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워 더욱 강하게 말했다.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5절).” 그들 말대로 당시에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유대 전역에서 예수님은 명성이 자자했다.
그때 빌라도가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라고 물은 것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임을 원래는 몰랐다는 뜻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 재빨리 머리를 굴려 골치 아픈 재판을 헤롯에게 넘기는 기회로 활용했다. 당시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 지역이었기에 예수님이 헤롯의 관할에 속한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 그때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냈다(7절). 그러나 그때 빌라도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단호하게 예수님의 석방 결정을 내려야 했다.
왜 그때 빌라도가 나약한 모습을 보였는가? 첫째,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 사람은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나약해진다. 둘째, 이기심 때문이었다. 대의(大義)가 없어지면 용기도 없어진다. 그래서 이기주의자는 대개 비겁하다. 셋째, 결단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힘이 없어 무력해지기보다 결단력이 없어 무력해진다. 표류하는 배처럼 우유부단하게 살지 않고 대의를 따라 좋은 결정을 내리고 그 선택한 길로 단호하게 가면 힘이 모이면서 무력함이 극복되고 그 선한 결단이 사회 정의를 세우는 촉매가 된다.
3. 사랑의 침묵을 앞세우라
빌라도가 보낸 예수님을 보고 처음에는 헤롯이 매우 기뻐했다.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 했고 이적을 행하는 것도 볼까 바랐기 때문이었다(8절). 그래서 헤롯이 여러 말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셨다(9절). 예수님은 의심과 호기심이 섞인 마음으로 하는 헛된 질문에는 구차한 설명이나 변명을 하지 않고 침묵하셨다. 그에 대해 “사랑의 주님이라면서 왜 소통 노력도 없이 대화를 거절합니까?”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개념을 오해한 것이다. 때로는 사랑의 거리두기와 사랑의 침묵이 필요하다.
남편이 싫은 언행을 할 때 아내가 그 언행이 싫다는 뜻으로 침묵하면 남편도 침묵하며 자기 언행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화해를 강요하며 그 화해를 거부하면 이렇게 말하는 남편이 있다. “왜 내 화해 요청을 받아 주지 않아요? 당신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그게 기독교적인 사랑이오?” 그는 사랑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화해 강요는 사랑을 내세워 자기를 받아 달라는 스토킹이 된다.
때린 사람이 맞은 사람에게 자기는 뒤 끝이 없다고 화해하자면서 화해를 받아낸 후 다음에도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난 사랑을 내세운 스토킹이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인 화해 강요가 거부되면 자숙하지도 않고 주변에 “내가 화해를 요청했는데 아내가 받아 주지 않아요.”라고 하면서 아내를 사랑이 없는 사람처럼 깎아내리는 것은 거짓으로 화해를 요청한 것이다. 즉 미안하다고 화해하자면서 그 화해가 안 받아들여졌다고 뒤에서 비판하고 돌아다니면 그 미안하다는 말과 화해하자는 태도는 거짓이 된다.
청년부에서 상대가 프러포즈를 거절하면 물러서야지 “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들러붙는 경우 거절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고 들러붙는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것인가? 아니다. 싫다고 할 때 들러붙어 사랑을 구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상대가 싫다면 조용히 물러서고 부부나 형제처럼 멀어질 수 없는 관계라면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까지 나를 좋게 변화시키며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사랑이다. 깊은 사랑이 바탕에 깔렸다면 적절한 사랑의 거리두기와 침묵은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매우 유용하다.
4.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
처음에 헤롯이 호의 가운데 질문할 때 교권주의자들은 기가 죽어 그냥 지켜보았는데 예수님이 침묵으로 일관하시자 헤롯은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침묵에 점차 자존심도 상하고 인상도 찌푸려지면서 마음이 돌아섰을 것이다. 그 상황을 포착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기세를 부리며 서서 힘써 고발했다(10절). 그러자 헤롯은 교권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호의가 없었음을 나타내려고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11절).
분봉왕 헤롯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전에는 정치적으로 원수처럼 지냈지만 그날 당일에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친구처럼 되었다(12절).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을 골치 아프게 여기고 헤롯에게 헤롯의 통치권을 존중하는 의미로 예수님을 넘겼는데 헤롯도 빌라도의 통치권을 존중하는 의미로 예수님을 도로 넘겼기에 잠시 서로 친구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골치 아픈 재판을 화해와 존중이란 명목으로 서로 떠넘긴 것이기에 결국 그들의 태도는 책임 회피적인 태도였다.
성숙과 미성숙이 무엇인가? 성숙과 미성숙을 판별하는 핵심 지표 중 하나가 책임감이 있느냐의 여부다. 성숙한 사랑은 책임감을 동반한 사랑이다. 배우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하는데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없어도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힘써 헌신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한 아빠가 자녀에게 충고했다. “얘야, 네가 만남 대상을 선택할 때 외적으로 큰 것이나 큰 곳만 좋아하는 사람은 가급적 삼가라. 특히 돈 욕심이나 인맥 욕심 때문에 작은 둥지를 버리고 큰 둥지만 찾아다니는 사람은 더욱 삼가라.” 그 충고는 좁은 문을 선택하는 삶과 더불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회 문제가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면서 생겨난다. 어디서든지 굳건한 책임감을 가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선한 결단을 하고 그 선한 결단에 매진해서 사회 정의를 이루는 초석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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