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인터넷성경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146과)2

Joyfule 2010. 10. 16. 21:22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146과)2

요나서(2): 회개와 사랑 (3-4장)

4. 교훈을 받는 선지자(4장)

4-1. 분노한 요나(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

  이 책이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않고 기록되었다면 이방인이 회개하는 절정에서 결론이 지어졌을 것이다. 사악한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받음으로 이야기를 절정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났고 요나는 그의 일을 완수했으며, 니느웨는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요나서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말해야 할 진정한 목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인간의 편협됨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요나서는 계속되어야만 했다.

 

  우리가 요나서 4장을 읽을 때에 놀라게 되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싫어하고 화를 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겨우 살아나온 선지자가 어떻게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어떤 사람은 그가 자기의 명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그가 말한대로 40일만에 니느웨 성이 멸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성은 구원을 받아 그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요나는 거짓 선지자가 될 위험에 처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요나가 분노한 진짜 이유는 (욘 4: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나는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을 형한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와 은혜를 시기했던 것이다. 요나는 회개했을 때에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가 용서를 받는 것은 기뻐하지 않았다. 요나는 1만 달란트를 용서받고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처럼 무자비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요나의 태도는 오늘날의 수많은 성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더 세상을 잘 다르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보다 심판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공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이 구원받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드러냈다. 우리말 성경에 '심히'라고 번역된 말(라아 그돌라)은 원래 '큰 악'(a great evil)을 의미하는 말이다. 처음에 이 단어는 니느웨 사람들의 악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4장에 와서는 요나의 무자비한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가 되고 말았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을 싫어하고 노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 앞에 큰 악이 된다.


4-2. 기도하는 요나(4:2-5)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4).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5)."

 

  요나는 성을 내기는 했지만, 기도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고국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니느웨가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니느웨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을 치려 했었다. 이는 당시에 니느웨가 이스라엘에게 매우 위협적인 나라였으며 장차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나라였기 때문이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커서, 니느웨를 심판하시려는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2).

요나 역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형의 모습과 비슷하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해주시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항의했다(3). 이러한 요나의 태도는 매우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시고 인내를 가지고 그를 설득하셨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했다. 하나님은 요나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이 말을 "내가 잠시 후에 니느웨를 심판할 것인데 네가 왜 화를 내느냐?"는 말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서 동편에 자기를 위해서 천막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 앉아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 지 지켜보고 있었다(5).


4-3. 박, 벨레, 바람(4:6-9)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6),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8).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9)."

 

  요나가 천막을 지은 후에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하여 기적적으로 빨리 자라게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불평하는 선지자를 위해 박넝쿨을 자라게 하여 그의 머리를 햇빛으로부터 가리어 주셨다. 이 부분에 오면 하나님에 대한 용어가 바뀌고 있다. (4:6)에 사용된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아도나이 엘로힘)은 요나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요나서 1-2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으로 "주"(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3장에서는 "하나님"(엘로힘)이란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4장에 이르면 두 말을 합친 용어를 사용하여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준비했다'는 말(예만)은 '정하다','제공하다','준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물고기'(1:17)와 '박 넝쿨, 벌레(7), 바람(8절)'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신 목적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용서해주신 이유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박넝쿨을 보고 심히 기뻐했다. 그는 아마도 이 박넝쿨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며, 결국 니느웨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벌레를 준비하여 다음 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셨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그 박넝쿨은 곧 시들고 말았다(7). 그리고 박 넝쿨의 잎이 벌레로 인해 사라지게 되자, 요나는 뜨거운 바람과 태양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했다(8). 시로코(Sirocco)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의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이다. 시로코가 불면 기운이 급상승하게 되며,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서 대낮의 기온을 유지한다. 그리고 동풍은 공기 중의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여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사람들의 불쾌지수가 극도로 높아져서 온순한 사람도 신경질적이 되고, 모든 초목도 한순간에 시들어 버린다. 요나는 뜨거운 바람과 햇빛을 인해 고통스러워 하면서 또 다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또 다시 요나에게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해 성을 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요나는 화나 가서 "내가 성을 내다 죽는다고 해도 합당하다"고 대답했다.


4-4. 하나님의 마음(4:10-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10),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11)" 

 

  하나님께서 빨리 자라는 박을 주신 이유는 분명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천히 자라는 식물을 주셨다면 요나는 그것에 물도 주고 가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가 수고하거나 배양하지도 않은 박넝쿨을 주셨다. 그박넝쿨은 하룻밤에 났다가 바람 앞에서 금방 시들어 버리는 허무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이러한 박 넝쿨을 매우 기뻐하고 아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큰 성읍, 즉 니느웨를 아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이 성 안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12만명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요나에게 상기시켜 주셨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1) 니느웨의 사람들 중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한다

 2)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신체적으로 어린 아이들을 말한다.

 3) 두 견해를 합친 것으로 어린 아이들과, 영적으로 미숙한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위의 견해 중에서 3) 의 견해가 무난해 보인다. 이는 신체적으로 어리고 정신적으로도 미성숙한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판단 능력이 미숙한 사람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해 심판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 성에는 가축들도 많이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죄없는 수많은 짐승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분노한 요나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이 심판을 철회한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선지자 요나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어 항거하지 못한다. 요나서는 그 대답을 독자들이 직접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요나서를 읽는 독자들은 스스로 요나서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용서하신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4-5. 적용: 요나서 4장의 의미

  이스라엘은 요나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사명을 가진 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고 분노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유대인 뿐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해 버렸다. 또한 처음에 주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으며, 또한 초월적인 환상을 통해서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후에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일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방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고 시기하는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환경과 설득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