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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158-1과)

Joyfule 2010. 12. 8. 08:35

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158-1과)

예레미야 애가(1): 배경과 서론

 

바벨론 강가에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시 137편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이국 땅에서 고난을 겪는 유대인들의 아픔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1-3).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서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조국과 시온을 애타게 그리워했다(4-6).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도와준 에돔(7-)과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8-)의 파멸을 위해 기도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후손들은 마지막 두 차례에 걸친(주전 596, 586년) 바벨론 침공으로 말미암아 지중해 연안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들에게 임한 재난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끝맺게 했지만, 한 편으로는 새로운 역사가 싹트고 있었다.


1. 주전 586년 이후의 유다의 지리적 상황

 

1-1. 국가 조직의 해체
  유다는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나라와 국가 조직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전지역을 완전히 파괴시켰기 때문에 다시 재건하는 데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유다의 성읍들은 대부분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에 황폐된 채로 남아 있었다.

1-2. 유다 지역이 둘로 분단됨
  이때에 유다의 영토는 둘로 나뉘어졌다. 유다의 일부분은 북쪽 사마리아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영토는 에돔 족속이 점유하고 있었다. 에돔 족속은 이때에 거주지를 사해 남동쪽에서 헤브론으로 옮겼으며, 후에 그들은 이두메아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후에 유대의 왕이 된 헤롯이 이두메아인이었다).

 

2. 흩어진 유대인들의 상황
  유능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그리고 유다에 남겨진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 정치적인 고역을 견디다 못해서 봇짐을 싸서 짊어지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수의 유대인들만 예루살렘 안팎에 남아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2-1. 애굽
  

다윗의 자손이며 국수주의자였던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한 군부 지도자들은 바벨론을 대신해서 이 지역을 관할하던 그달리야(그다랴) 총독을 살해했다. 그 후에 그들은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피신을 했다. 그 후로 애굽은 점차로 유다 난민들의 주요한 집결지가 되었고, 약 100년이 지난 후에는 유다 자손들이 나일강 어귀에 있는 엘레판틴 섬(현재의 아스완 섬)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아낫 여신을 함께 섬기는 혼합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후에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와 그 밖의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되었으며, 헬라 시대에는(주전 333년 이후) 애굽이 사실상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2-2.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
  수많은 유대인들은 애굽뿐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있는 여러 나라로 이민을 가서 살았다. 그리고 후에는 유대에 사는 유대인보다 유대를 떠나 사는 유대인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흩어져 살던 각 나라에서 유대인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 때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2-3. 바벨론

 

 가.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얼마나 되는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일반적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실제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은 약 4,600명 정도였다(렘 52:28-30). 이 숫자가 당시의 관습대로 남자들만 계산한 것이라고 간주해도, 바벨론에 끌려간 전체 포로의 수는 15,00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유로운 생활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들은 그 곳에서 생활하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바베론에서 일정한 거처를 정하고(겔 8:1-)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함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당시 반 유대 움직임이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데 큰 불이익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바벨론 문명이 고국의 문명보다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목축과 농사에 의존하던 단조로운 생활을 벗어나서 바벨론 안과 그 주변에서 고도로 발달된 농업 기술과 산업 시설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다. 회당의 발생
  특히 바벨론 포로 시대에는 상당수에 달하는 유다 백성들이 예배와 율법 연구를 위한 모임들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에 회당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회당이란 말은 "함께 모인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쉬나고게"에서 나왔다.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흩어져서 살고 있던 여러 지역에 회당을 세우고 전통적인 종교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세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