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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3

Joyfule 2008. 9. 15. 00:20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3  
    이야기를 다 끝냈을 때 나는 약간의 박수까지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아이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무표정했지만 
    크로머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날카롭게 나를 훑어보더니 위협하는 투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야.” 
    ”틀림없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그럼, 틀림없이 했어.” 
    나는 지지 않고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했지만 
    내심으로는 불안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맹세할 수 있어?” 
    나는 겁이 덜컥 났지만 계속 그렇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맹세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결국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좋아.” 크로머는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조금 뒤 
    크로머가 돌아가자고 말했을 때 무척 기뻤다. 
    다리 위에 이르자 난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머뭇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혼자 서둘 건 없어. 어차피 집으로 가는 길은 같잖아.” 
    프란츠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도 나는 감히 도망칠 수가 없었고 
    그는 우리 집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윽고 우리 집 대문이 보이고 육중한 놋쇠 손잡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창문과 어머니 방의 커튼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저절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밝고, 평화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가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뒤어들어가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프란츠가 뒤따라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안마당쪽으로만 햇빛이 들어오는 서늘하고 침침한 타일 복도에서 
    프란츠는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팔을 붙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서둘 건 없어.”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팔을 잡은 그의 손 힘이 무쇠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가슴을 쳤다. 
    급히 지금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르면 누군가 달려나와 
    나를 구해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내가 먼저 물었다. 
    ”뭐 대수로운 건 아냐. 잠깐 네게 뭘 물어보려는 것뿐이야. 
    굳이 다른 아이들이 들을 필요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 대체 무슨 이야기를 또 해야 하니? 난 올라가봐야 해. 알겠어?” 
    ”넌 알고 있잖아, 방앗간 옆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를.” 
    프란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몰라. 난 그저 방앗간집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프란츠가 한쪽 팔로 내 몸을 감아 바짝 낚아챘기 때문에 
    바로 코 앞에 그의 얼굴이 닥아와 있었다. 
    심술궂은 시선과 악의에 찬 웃음을 띤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 내가 가르쳐주지. 
    사과를 도둑맞고 있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야. 
    게다가 훔쳐 간 사람을 알려주면 2마르크를 주겠다고 
    주인이 말했다는 것도 난 알고 있어.” 
    ”뭐라구? 아, 맙소사!” 
    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넌 설마 주인에가 말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나는 확실히 느꼈다. 
    그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며, 
    그에게 있어 배신 따위는 결코 죄책감을 느낄 만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우리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으니까. 
    ”가서 말하지 말라구?” 
    프란츠는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이봐, 넌 내가 2마르크 짜리 지폐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위조화폐라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뭐야. 
    난 가난뱅이란 말야. 너처럼 돈 많은 아버지를 가진 것도 아니겠다, 
    내가 왜 2마르크를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겠니. 
    그 주인은 아마 조금 더 줄지도 모르는데 말야.” 
    프란츠는 갑자기 나를 놓아주었다. 
    우리 집 현관은 더 이상 평화나 안정의 향기가 풍기는 곳이 아니었고, 
    나를 감싸고 있는 세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주인은 나를 도둑놈이라고 고발하겠지. 
    사람들은 이 일을 아버지에게 말할 것이고 
    어쩌면 경찰이 날 잡으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혼돈스런 세계에 존재하는 갖가지 공포가 나를 위협해 왔다.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맹세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에게 돈을 주지 않는 한 위기를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절망감을 느끼면서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다 샅샅이 훑어 보았다. 
    사과 하나, 칼 한 자루도 내겐 없었다. 
    그때 불쑥 시계 생각이 났다. 낡은 은시계였다.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가지고 다닐 뿐이었지만 
    옛날 할머니 적부터 전해 오는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시계를 끄집어내었다. 
    ”크로머, 제발 나를 일러바치지는 말아줘. 
    그래서 네게 좋을 게 뭐가 있니? 
    내가 이 시계를 줄게. 자, 좀 봐. 난 정말 가진 게 없어서 그래. 
    이걸 가져, 은으로 만든 거야, 아주 고급이야. 
    물론 좀 고쳐야 되긴 하지만.” 
    그는 싱긋 웃으며 시계를 큰 손으로 받아쥐었다.